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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24)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IX 교회론 (2) 

 

C. 은혜의 수단 (혹은 은혜의 방편, The means of grace, media gratia)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수단이나, 방편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특정한 방법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도 없고, 성도의 삶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소요리문답 88은 은혜의 수단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택들을 전달하시는 일반적 외적 수단은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인데, 그 모두가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효력이 있다.”

역사를 보면 은혜의 수단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례와 교회 자체를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성례의 행위와 의식 그 자체 안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하면 의식 그 자체가 신비한 능력이 있어, 의식에 참여하면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루터교회』는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말씀을 떠나서는 성례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자체에 효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비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이 자연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영적인 효력과 유익을 가져오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일반적인 수단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말씀과 성례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을 무시한다. 

『이성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단지 도덕적인 영역에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means)과 도구 (instrument)가 된다고 주장한다. 은혜의 수단들을 미신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은혜의 도구들을 매우 귀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1.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씀이다. 이것은 성경과 또한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의미한다. 말씀과 성령은 깊은 관계가 있다. 율법주의 (합리주의, 펠라기우스)는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필요를 말하지 아니하며,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는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고, 말씀의 필요성을 말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Reformed Faith)는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함을 주장한다 (the Spirit works “with the Word,” cum verbo).

말씀에는 율법과 복음의 두 부분이 있다. 율법은 사람이 죄인이며,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하여 복음을 믿도록 하고,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서 차이가 있다. 구약은 복음의 형태가 약속, 예언, 모형, 그리고 그림자의 형태로 있다가, 신약시대에 복음과 구주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에는 모두 율법과 복음의 요소가 있다.

 

2. 성례

 

【소요리 문답 제92문】 성례는 무엇인가? 【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은혜들이 사람들이 지각 (감각)할 수 있는 표 (sign)로써 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인쳐지며 적용된다.

【소요리문답 제93문】 신약 성경이 말하는 성례는 어떤 것들인가? 【답】 신약 성경이 말하는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다. 

성례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예식이다. 사람들이 고안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신적 권위가 있다. 벨기에 신앙고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감각함(insensitivity)과 연약함을 잊지 않으시어 성례를 제정하시고, 이것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약속을 우리에게 인치시고(seal),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

성례는 내면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외적의 가시적인 표와 인치는 것(visible signs and seals)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수단 (방편)으로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말씀은 성례없이도 스스로 그 능력을 나타내고 완전하지만, 그러나 성례는 말씀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다.

말씀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성례는 다만 믿음을 견고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말씀은 누구에게나 전해지지만, 성례는 진실된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진다.

 

1) 세례

 

【소요리 문답 94】 “세례란 성례의 하나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음과 은혜 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다는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세례의 방식, The Mode of Baptism】 세례를 베푸는 일반적인 방식은 “머리에 물을 뿌리는 방법(sprinkling), “물에 잠그는 침례 (immersion), 그리고 머리에 물을 붓는 (pouring) 방법들이 있다. 

세례의 방식을 온 몸을 잠그는 침례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례 혹은 침례 어느 것이 맞는가?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혹은 침례 그 자체가 실체 (중생함을 받음)를 외적으로 표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체이며 외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다.

침례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정결하게 하다, 혹은 씻는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결하게 하는 예식은 물을 뿌리거나 물에 적시는 표지만으로 실시되어진다 (반드시 물속에 잠근다는 의미가 없다). 구약에서 정결하게 하는 예식은 물을 뿌리는 예식이다 (시 51:7; 겔 36:25; 요 3:25-26; 행 2:38; 22:16; 히 10:22; 벧전 3:21). 

그리고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말씀을 근거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몸이 물속에 잠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낮은 곳,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다가 언덕으로 올라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행 8:38-39도 같은 의미이다.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그리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라고 한다. 만약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다고 해도, 본문은 침례를 베푸는 자와 침례를 받는 자가 모두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로 침례를 베푸는 집례자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침례를 받는 사람만이 물속에 들어간다. 

세례의 방식이 물을 뿌리는 행위 혹은 물속에 잠그는 행위 문제로 너무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세례 자체가 실체에 대한 외적인 표시이며 인을 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체, 곧 중생과 거듭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례의 의미】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 세례는 언약에 가입되었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

구약의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표시(sign)이며, 인(seal) 을 치는 것이다.

(2) 세례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되었다는 의미: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τοῦ σώματος τῆς σαρκός), 칼빈은 이것을 우리의 죄와 부패성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세례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와 부패성 전체를 벗기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지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다(딛 3:5; 벧전 1:2; 요일 1:7; 계 1:5).

(3)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다는 의미: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여기의 함께 (συν)의 의미는 “연합” 혹은 “접붙임”을 의미한다. 로마서 6:3에서도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제 예수 믿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한다. 

【유아세례】 유아세례는 이 유아가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 된다는 표(sign)와 인(seal)이 된다는 의식이다. 유아세례를 받는 유아에 대한 부모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아들을 가르쳐야 하며, 유아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유아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유아들에게 경건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1)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 언약을 주셨다. 이 은혜 언약의 표는 할례이었다(창 17:9-10; 롬 4:10-11). 신약 시대의 세례는 구약시대 할례처럼 언약의 표시와 인(sign and seal)이다(롬 6:3-4; 고전 10:2; 12:13).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상징이다. 

세례와 할례가 외적인 모양을 다르지만, 그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모두 은혜 언약의 외적인 표현이다.

신약 교회와 구약 교회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동일하며, 발전적인 연속체이다. 구약 교회는 신약교회의 예표가 되며, 신약 교회는 실체가 된다. 그러므로 신구약 교회는 본질상 동일한 실체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도 신, 구약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기초한다. 

유아세례는 유아들까지 포함되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기초한다. 바빙크의 <개혁주의 교의학 4권>에 의하면, “장년이나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믿음과 회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언약 때문이다. 유아세례의 근거로서 이 보다 더욱 든든한 것이 없다.”

(2) 땅위의 교회에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도 섞여 있다(마 13:24-30). 그러므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여부를 완벽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에게 은혜의 방편을 베풀 수 밖에 없다. 

성령께서 신앙의 원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아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신앙 고백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과 은혜 언약의 신실함 때문이다. 유아가 은혜의 수단인 세례의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세례에서 제외될 수 없다. 성인이나 유아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3) 교회 역사에서 어거스틴은 유아세례는 사도적인 전통 (apostolica tradition)이며, 자기 시대에 유아세례가 실시되고 있다고 했다. 키프리안이 참여한 공의회 (253 A.D.)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선언했다. 크리소스톰도 유아세례를 베푼다고 했다. 그레고리는 “한나가 사무엘이 출생되기 전에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 아이는 어렸을 때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 했다. 

KHL0206@gmail.com

 

06.2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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