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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20)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D. 칭의 (Justification)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거듭나게 하시어 새 생명을 주신다 (중생). 중생함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회개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을 가진 자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1. 칭의는 하나님께서 중생한 자들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법적인 선포이다 (Legal declaration by God).

 

성경에 “칭의”는 헬라어 “δικαιόω” “의롭다고 선언하다” (to declare righteous) 의미이다. “의롭게 만들다”는 의미가 아니다. (눅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이곳에 사용된 용어는 “ἐδικαίωσαν” 이며 이것은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declared as righteous). 본문에서 백성들과 세리들이 하나님을 의롭게 만들 수가 없다. 단지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칭의는 믿는 성도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롬 3:20, 26, 28; 5:1; 8:30; 10:4, 10; 갈. 2:16; 3:24). 특별히 로마서 4:5에서 잘 나타나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나님께서 그들은 내적으로 의롭게 만드시는 것(God makes the ungodly to be righteous)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은혜가 칭의이다. 그들의 믿음도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칭의의 은혜를 받아드리는 방편 (means)일 뿐이다. 

그리고 칭의의 반대말은 정죄 (condemnation)이다. 둘다 법적인 선언이다 (a legal declaration). 

구약에도 “칭의”의 개념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신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재판장들이 사람들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 단지 그들이 하는 것은 “의롭다, 혹은 죄가 있다”라고 재판장은 선언하는 것뿐이다 (출 23:7; 왕상 8:32’ 대하 6:23). 

분명히 성경의 칭의의 개념은 내면적인 문제 (의롭게 만드는 것)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성을 말한다. 

존 머리 (John Murray) 교수는 “ 구속의 성취와 적용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에서 중생과 칭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중생과 칭의의 관계는 마치 외과 의사와 판사의 역할의 차이다. 암을 제거할때에 외과 의사는 우리 속에서 무슨 일을 하지만, 판사는 외적으로 판결을 내린다. 복음의 순수성은 성화와 칭의의 차이를 잘 이해할때에 복음의 순수겅이 유지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복음을 변질 시킨다.” 

 

2. 칭의는 우리의 죄의 용서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진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죄 용서함으로 끝이 나면 도덕적으로 중립지대에 존재한다. 그런데 칭의의 은혜는 중생한 자를 중립지대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칭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리고 

(롬 4:3; 창 15:6을 인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이 롬 5:19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확증이 됨을 말한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전가 (imputation)는 세개의 경우가 있다.

 (1) 아담의 죄가 그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된다. 

(2)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셨다. (고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3) 그리스도의 의가 성도들에게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의롭다고 “의로운 자로 선언”하신다. 

칭의의 근거가 되는 우리의 믿음이 공로가 될 수 없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성경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성경은 우리의 칭의가 “우리의 믿음 때문에 (Because of faith 혹은 On account of faith)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성경은 항상 “믿음으로” (By faith) 혹은 “믿음을 통하여” (Through faith)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믿음은 칭의의 방편 혹은 수단 (instrument)이 되며 결코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칭의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다. 

 

E. 양자됨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됨)

 

중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칭의를 통해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법적인 지위를 주시고, 그리고 양자 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가족이 되게 하신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요일 3:1),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시 103:13-14),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마 6:32),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신다 (마 7:11).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롬 8:14). 

그리고 자녀 됨의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신다 (히 12:5-6; 잠 3:11-12). (히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징계는 모두 우리를 위함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F. 성화 (Sanctification): 

 

소요리 문답 35문에 의하면, “성화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역사로서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 (Whole man)이 새로워지게 되고, 점점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되는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는? 칭의는 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 (법적 위치)를 말하지만, 성화는 성도들의 내적인 상태를 말한다. 칭의는 단회적이지만 (once for all time), 성화는 이 세상에서 지속적이다 (continuous throughout life). 칭의는 전적 하나님의 일이지만, 성화는 우리가 협력한다. 칭의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지만 (perfect in this life), 성화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지 못한다. 칭의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지만, 성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1. 성화는 성도들이 거듭남 (중생)의 은혜를 입을 때에 이미 시작이 된다. 

(행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칭했다. 이 말은 “ἡγιασμένοις” (having been sanctified) 명사형 완료 수동분사 (substantival perfect passive participle)으로 이것은 “ 완성된 과거의 행동과 계속되는 결과를 모두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과거에 중생을 받을 때에), 그리고 중생함을 받고 난 후 계속적으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자들이다. 

2. 성화는 이 세상에서 계속 자라간다.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성도들이 “전에는” (예수 믿기 전에) 점점 죄로 향해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성화를 위해 의를 향하여 점점 나아간다. 그리고 빌 3:13-14에서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러나 거룩함을 향하여 점차적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한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3. 성화는 이 세상에서 계속되지만 완성되지 못하며, 우리가 죽을 때에 혹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완성된다. 

4. 완전주의 (perfectionism)는 잘못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요한일서 3:9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근거로 해서 중생한 자는 죄를 범치 아니한다고 주장한다는 그룹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들을 완전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 (οὐ ἁμαρτάνειν)” 라는 헬라어 표현은 “계속 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 (not to continue sinning)” 뜻이다. 현재형 동사 (능동태 부정사)로서 지속적, 습관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계속 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의미이다.

KHL0206@gmail.com

04.2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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