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VII. 기독론 (Christology) (4)
3. 왕직
구약의 왕들은 신약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예표한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 7장은 다윗 언약의 절정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와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윗의 왕위는 유다의 멸망(586 BC)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면 이 나라와 이 왕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말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눅 1:31-33),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분명히 다윗의 왕위와 다윗의 나라는 신약에 오실 메시야의 왕직과 메시야 왕국의 모형과 그림자이었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다윗의 언약이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사야의 메시야 탄생의 예언을 보면,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는 왕이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사야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리고 구약 시 110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되신 메시야 이심을 다윗의 입을 통해 전한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은 “성부 하나님”께서 “나의 (다윗)의 주”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다윗의 주는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 타이틀이 “주” (κύριος)이다.
스가랴 9:9에서도 오실 메시야의 왕되심을 말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많은 곳에서 가르친다 (눅 19:38; 마 21:5; 요 1:49; 행 17:7; 엡 1:20-22; 마 28:18; 고전 15:25; 계 19:16).
고전 15:27; 엡 1:20-22에서 “특별히 만물 (모든 것을) 발아래 두신다” 하신다. 여기에 “모든 것 (πάντα)”은 원수들을 포함한 만물이다. 예수님만이 온 우주 만물의 왕이시고, 주가 되신다. 주님께서 만유의 왕이시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VIII. 구원론 (Soteriology 혹은 The Doctrine of Salvation)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 (객관적 사건)을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 (주관적 사건) 시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론을 종종 성령론으로 부른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은총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로 가능하다. 성부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 성취하셨고, 성령께서 택한 자들에게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는 성 삼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에는 순서가 있다. 이것을 구원의 서정 (the 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 이라고 한다. 이 구원의 적용 순서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존 머리의 주장에 따라, 부르심, 중생, 회개와 믿음,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궁극적 구원, 그리고 영화의 순서이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순서는 “시간순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 (not chronological but logical order)이다.
A. 하나님의 소명 (부르심, calling)
1. 외적 소명 (external calling):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한 복음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전하고, 믿으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2. 내적 (효과적) 소명 (internal or effective calling): 외적 소명이 행해질 때에 성령께서 듣는 자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복음을 받아, 믿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을 내적 소명, 혹은 효과적 소명이라 한다.
B. 중생 (Regeneration, Born Again)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중생케 하신다 (거듭남). 중생의 본질은
1)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중생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인간의 힘과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한다. 중생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겔 36:26-27에서도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인간은 수동적임을 가르쳐준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중요한 포인터는 중생은 부르심 (소명)의 결과이다. 물론 이 은혜는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순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다.
2) 중생의 본질은 신비적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것은 신비적이다. 요 3:7-8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본질을 설명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우리는 중생이 과정을 알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임을 가르쳐준다.
3) 중생은 우리의 전인격 (whole person)인 변화이다. 지, 정, 의 에 영향을 끼친다. 영혼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4) 중생은 순간적으로 즉각적인 변화이다. 성화는 많은 과정과 반복적이지만, 그러나 중생은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성취한다.
5) 중생은 믿음 이전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Regeneration comes before repentance and faith). 중생의 역사가 없으면 영적으로 죽은 자기 때문에 회개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영적으로 죽었기에 영적인 감각 (회개, 믿음)이 없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살려주실 때에 (중생) 영적 감각이 생겨,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원을 위해서 “중생함을 받아라” 명령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구원을 위해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형태가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형태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6) 중생의 사건에는 삶에서 열매가 나타난다. 열매 가운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 말은 헬라어 “완료 분사 (perfect participle)”이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중생)” 사건이 새로운 삶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중생에는 삶에 많은 열매가 나타나는데 첫째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열매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 하나님의 의 (요일 2:29), 사랑 (요일 4:7), 세상을 이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 (요일 5:3-4),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많은 열매가 나타난다.
C. 회개와 믿음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중생 (거듭남)하게 하신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간다. 회개는 죄를 떠나는 것이며, 믿음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회개와 믿음이 어느 것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같이 온다. 존 머리 (John Murray) 교수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 (penitent faith)이며, 참된 회개는 믿음있는 회개 (believing repentance)이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을 수 없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회개할 수 없다.
1)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일평생 한 번 (once for all) 일어나는 사건이다. 2) 그러나 성화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러한 회개의 기도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회개 기도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나?” 책망하셨다. 이것은 이미 믿는자들에게 대한 성화에 이르는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과 회개는 지, 정, 의가 동반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에는 지식 (Notitia;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동의 (assensus)가 필요하며, 나아가서 구원을 위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fiducia).
복음에 대한 분명한 내용을 알아야 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해야 하며, 나아가서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는 believe 보다는 trust가 더욱 성경적인 의미와 가깝다. 오늘날 일반적인 사실을 인정할 때 믿는다 (believe)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예를 들면 “나는 미국의 수도는 Washington D.C. 인 것을 믿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적인 결단이나, 인격적인 신뢰가 필요하지 아니하다.
참된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believe” 라는 용어보다는 “trust” 단어가 더욱 성경의 믿음과 가깝다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싶으면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제 35장을 보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치 손님을 집으로 영접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자” (believe in Him),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예수님 안에서 믿는자” 라는 표현에 대해서, 레온 모리스 (Leon Morris)는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구약 적인 표현으로 사람 앞에 전치사 “εἰς” (안에서, in)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믿음이라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회개도 지적 요소 (죄는 나쁘다), 감정적인 요소 (죄에 대해 애통함과 미워함), 나아가서 의지적인 요소 (죄를 끊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결단과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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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