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다”고 했다.(전 3:14) 요셉이 은 이십에 팔리던 정황 역시 그렇다. 무엇 보다 그 사건의 타이밍(timing)을 살펴보자.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창 37:28)
이 “때”는 요셉의 형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진 후 음식을 먹느라 같이 모여 앉아 있던 때였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창 37:25) 그 자리에서 유다는 형제들에게 요셉을 팔자고 제안했고, 즉시 형제들은 합의를 보아 구덩이에서 요셉을 끌어올렸다. 바로 “그 때에” 상인들이 그 곳을 지나고 있었고 형제들은 요셉을 은 이십에 팔 수 있었다. 그 시간, 그 곳, 유다의 말, 형제들의 결정, 상인들이 지나간 타이밍 이 모두는 정확히 일치했고, 그 결과 요셉은 종으로 팔릴 수 있었다.
이 “때” 르우벤은 그 자리에 없었다: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 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창 37:29) 같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데 왜 유독 르우벤만 자리를 비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요셉이 종으로 팔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이 팔린 것을 알고는 자기 옷을 찢으며,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30절) 울부짖는 르우벤의 반응으로 미뤄 보건대, 요셉을 파는 일은 장자 르우벤이 그 자리를 잠시 비우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 “때” 르우벤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르우벤이 그 “때” 없었기에 요셉이 팔릴 수 있었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 도단에 이르렀을 때, 형제들은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창 37:20)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르우벤은 그 자리에 함께 있어서 아우들이 요셉을 죽이는 것을 막고, 그를 산채로 구덩이에 던지도록 주도한 바 있다(21절). 창세기 저자는 그 장면에서 르우벤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22절). 즉, 요셉이 죽지 않은 것은 그를 살려 아버지 야곱에게 돌려보내려는 르우벤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 르우벤이 잠시 후 자리를 비웠고, 미디안 상인들은 바로 그 “때” 이 지점을 지나간 것이다. 만약 르우벤이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요셉은 팔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팔려 가야 했다. 그가 앞서 애굽에 내려가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기근을 피할 수 있도록 발판을 구축하고, 나아가서는 그 후손들로 하여금 크게 장성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요셉의 삶을 이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요셉은 종으로 팔려 가는 고초를 감당해야 했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6-19)
이 섭리에 따라 르우벤은 요셉의 생명을 지켜냈고,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져야 했으며, 르우벤이 자리를 잠시 비운 그 “때” 형제들은 앉아 음식을 먹다 유다의 말을 들어야 했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은 바로 그 “때” 그 자리를 지나며 요셉을 사야 했다. 마치 한 편의 극에서 각본에 맞춰 출연자들이 정확히 무대에 등장하고 사라지듯,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 이들은 일치의 더 함도, 덜 함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정확히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타이밍의 조절은 야곱이 요셉을 헤브론에서 세겜으로 보내던 때 이미 시작됐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창 37:14)
야곱이 아들들을 걱정한 이유는 바로 이 년 전, 그 아들들이 세겜에서 하몰의 가문을 살육하고 노략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야곱 일행은 가나안 사람들의 보복을 두려워해야 했는데(창 34:30), 하나님이 지키셔서 추격당하지 않고 무사히 세겜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창 35:5) 그렇게 세겜의 원한을 산 아들들이 세겜에 다시 가 있었는데, 이는 메마른 헤브론에서는 더 이상 양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의 안부가 걱정되었고, “십칠 세의 소년”(창 37:2) 요셉을 헤브론에서 세겜으로 보내기에 이르렀다. 대략 50마일, 80km의 거리였다.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삼일 길을 걸어서 세겜에 도착한 요셉은 “방황”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창 37:15-17)
그 말을 듣고 요셉은 세겜에서 도단까지 13마일(21 km) 길을 더 가, 드디어 형들을 만났다. 도합 63마일(101 km)를 걸은 것이다. 그렇게 걷고, 자고, 쉬고, 먹고, 또 도중에 “방황”한 시간이 합쳐져, 정확하게 그로 하여금 미디안 상인이 나타난 그 “때”를 맞추게 한 것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다”(전 3:14)
그렇게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린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가 종으로 팔렸다. 그 때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겼기 때문에(창 46:34), 목자의 신분으로 애굽에 정착할 수는 없었을 야곱과 그 자손을 위해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종의 신분으로 애굽에 어려움 없이 들어가게 하셨고, 그 결과 야곱의 모든 식솔이 그 뒤를 따를 길을 트게 하셨으며, 훗날 그들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그 “때”의 타이밍은 하나님의 뜻에 정확히 맞춰져 있었고, 야곱, 형제들, 상인들, 그리고 요셉 모두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일치의 더 함도, 덜 함도 없이 그 섭리에 따라 움직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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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