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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땅 (21) - 디나의 사건

박성현 박사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디나의 “강간”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세는 세심한 단어 선택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연루된 인물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이 사건을 살필 수 있게 했다.

우선 디나를 보자. 디나는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창 34:1) “야곱의 딸”이었다.(3, 19절) 사건이 일어나던 시기에 디나는 아직 결혼 이전인 “소녀(naʿărâ)”였고(창 34:3) 아울러 나이가 어린 “소녀(yaldâ)”였다.(4절)

디나는 가나안의 “딸들”의 삶과 차림새를 궁금해했다: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창 34:1) 여기서 ‘본다’는 표현은 ‘궁금하고 원해서 본다’는 뜻으로, 같은 용례가 아가서에 있다 -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아 6:11) 

어린 디나는 성안에 사는 가나안 소녀들의 삶이 보고 싶어 당시 관례를 깨고 홀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보러” 나간 디나를 세겜이 “보고” 강간했다는 것이 우리가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핵심이다.(창 34:2)

이제 가해자 세겜을 보자. 세겜은 “그 땅의 추장”인 “하몰의 아들”이었다(창 34:2; 개역개정은 세겜이 추장이었다고 잘못 옮기고 있다). 아울러 그를 “소년(naʿar)”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19절) 그 역시 아직 결혼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간자 치고는 그가 디나에 대해 가진 마음이 진솔되고 간절하다: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창 34:4) 이 말에서 읽히듯 그가 디나를 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저자도 이 면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창 34:3) 원문을 통해 살피자면, 마치 아담이 하와를 보고 고백했듯(창 2:24), 그의 ‘혼’이 디나와 ‘합하여(dāḇaq)’ 사랑하고 디나의 마음에 말하기를(dibbēr ʿal-lēḇ) 마치 보아스가 룻에게 하듯(룻 2:13) 했다는 것이다.

세겜의 관점에서 그의 사랑은 진실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디나의 오라버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창 34:11-12)

만약 세겜이 단순한 강간자라면 다음과 같은 고대근동 법을 따라 의무를 질 것이다: 미혼의 남자가 미혼의 소녀를 “억제해 붙잡고 강간했을 때” 그는 “소녀의 세배 가치의 은을 그 아버지에게 줄 것이요 그녀를 강간한 자가 그녀와 결혼할 것이요, 그는 그녀를 버리지 못한다.”(중기 앗수르 MAL 토판A, 55문단)

그런데 세겜은 의무로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디나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를 강간자로 무작정 몰아가기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창 34:2) – 이를 원문에 맞게 번역하면 이렇다: ‘세겜이 그녀를 보고 데려가 그녀와 함께 동침하고 그녀를 욕되게 했다’. 이 사건과 흔히 비교되는 다말의 강간 사건의 경우 암몬은 다말을 ‘힘으로 눌러 욕보이고 그녀와 동침했다’(히브리어 직역, 삼하 13:14). 프라이머-켄스키(T. Frymer-Kensky)가 관찰했듯이 이 두 사건 사이에 차이는 암논-다말의 경우 ‘힘으로 눌러 욕보임’이 전개 과정임에 반해 세겜-디나의 경우 강압적 요소가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욕보임’이 그 과정이 아닌 결과라는 점이다. 즉, 합의적 성관계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겜-디나의 사건은 당시 고대근동 법보다는 오히려 후에 모세를 통해 제정될 이스라엘의 법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출 2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현대 법적 관점에서 여전히 강간 사건으로 봐야 할 이유는 세겜 스스로가 말했듯이 디나는 어린 “소녀(yaldâ)”였기 때문이다.(창 34:4) 비록 합의적 성관계였다 할지라도 디나가 온전한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어린’ 소녀였음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를 법정 강간(statutory rape)이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 본 디나의 강간 사건

그럴 뿐만 아니다. 고대근동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연령과 상관없이 결혼 전에는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있었다. 예외가 되는 경우는 오직 창녀뿐이었다. 그래서 세겜-디나의 경우, 만약 합의적 성관계임이 맞았다면 이는 디나가 “창녀”로 비쳐지는 것이며 이를 유도한(‘데려간’) 세겜을 죽인 것은 옳은 처사였다는 것이 시므온과 레위의 주장의 핵심이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창 34:31)

결국 시므온과 레위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한 강간 사건이 아닌, 야곱의 딸을 창녀로 전락시킨 자와 그 가문에 대한 전쟁이었고, 그들은 ‘계략’(“속여”, 창 34:13), “기습”(25절), ‘전멸’(25절), “노략”(27-29절) 등 전형적인 전쟁의 형태로 이 사건을 끌고 갔다.

이 사건 전체에서 야곱은 그 어떤 대책을 내놓지도, 또 지도력을 발휘하지도 못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마치 사라를 빼앗기고 속수무책이었던 아브라함(창 12, 20)처럼, 또 리브가를 그랄 사람들에게 내 줄 뻔한 이삭처럼(창 26), 야곱은 딸 디나를 가나안 사람에게 빼앗기고는 속수무책이다.(창 34:5) 만약 디나가 라헬의 딸이었으면 달랐을까? 이 사건에 노가 격동한 것은 야곱이 아닌 그의 아들들이었고(창 34:7), 칼을 들고 하몰 일가를 죽여(25절) 가나안으로부터 디나를 되찾아온 것은 결국 디나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시므온과 레위였음을 저자는 놓지지 않는다.(26절)

이런 야곱이기에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창 34:30)라며 시므온과 레위의 피흘림을 책망하는 야곱의 말이 무게 없이 들릴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땅의 주민”은 아직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 도구로 사용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 그 일들이 치러질 날이 언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가나안과 함께 그 땅에서 기거해야 할 때다. 그러기에 세겜을 진멸하고자 한 시므온과 레위의 피흘림은 잘못이라는 것이 족장 야곱의 관점의 한 면이다.

이제 저자가 더하는 또 하나의 관점을 살펴보자. 저자는 세겜이 디나에 대해 가진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누누이 인정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결과가 ‘더럽힘’이었다는 중요한 신학적 결론을 내려준다.(창 34:5, 13, 27) 모세는 이 단어를 레위기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는데, ‘부정하다(ṭāmēʾ)’로 자주 번역되는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를 방해받고 있는 상태다. 디나의 사건이 설사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디나로 하여금 제의적 ‘정결’을 상실케 했기에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성도가 가나안에 사는 동안 ‘합의’의 상황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럴수록 예배자는 예수 안에서의 ‘정결’을 기뻐하며 누려야 할 것이다.

spark4@gordonconwell.edu

1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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