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아침에 보니 레아라”(창 29:25)
신혼 초야를 치르고 깬 야곱이 당면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라헬일 것으로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그 언니였던 것이다. 저녁이고(창 29:23) 또 신부의 얼굴을 베일로 가리기에 야곱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알고 라반이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다.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창 29:25) – 라반에게 속은 야곱이 따졌다.
그런데 이 장면은 전에 있었던 한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
“에서가…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4-35) – 야곱에게 속은 에서와 이삭의 대화다.
‘속임’(rmh)을 공통으로 갖는 이 두 경험에서 야곱은 먼저 가해자였고 후에는 피해자였다.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창 27:37) – 에서의 울부짖음이 여호와의 복의 약속을 되돌릴 수 없었듯이, 야곱 역시 그의 혼인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창 29:26) 그리고 나서 라반은 계획된 시나리오를 진행시킨다: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창 29:27)
사실 처음에 알아봤어야 했다. 야곱이 라반을 찾아와 처음 만났을 때 라반이 이렇게 물었었다:
“네가 비록 내‘아우’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창 29:15)
물론 개역개정을 보면‘아우’가 아닌 “생질”이라 되어 있다. 하지만 원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형, 아우’를 가리키는ʾāḥ다. 형을 피해 외삼촌집에 온 것인데 그 삼촌이 던지는 말이 마치 형 에서가 자기를 부르듯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창 29:15)
라반은 야곱에게 서로의 관계를 삼촌과 조카가 아닌, 고용주와 품꾼으로 하겠다는 뜻을 건넨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야곱이 레아와 라헬의 남편이 되어 열 두 자녀를 거느린 아버지가 된 후에도 라반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창 30:28)
삼촌과 조카도, 또 장인과 사위도 아닌, 여전히 고용주와 품꾼의 관계일 뿐임을 다시 각인시키는 말이다.
이렇듯 라반은 야곱에게 있어서 에서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인척이었고, 에서에게서 가로챈 복이 야곱에게 내리지 못하도록 작정하고 나서기라도 한 듯 야곱의 품삯을 자그마치 열 번이나 바꾼 고약한 고용주였다.(창 31:41) 야곱의 고백대로,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야곱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창 31:42)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야곱이 초래한 저지른 큰 잘못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레아를 아내로 떠 안은지 한 주 후, 라반의 지침대로 레아의 동생 라헬이 야곱에게 작은 처로 주어졌고,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창 29:30) 결국 그의 집은 오래지 않아 두 자매가 한 남편을 두고 서로 싸우는 전쟁터가 되게 하는 구실을 제공하는데(창 29:31-30:24), 여기서 야곱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에서와 라반과의 갈등을 집안에서 다시 경험케 된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
라헬이 야곱에게 한 말인데, 이 때 “낳게 하라”는 표현은 ‘달라’(hāḇâ)는 명령법의 동사를 의역한 것이다. 자식을 ‘달라’는 라헬의‘명령’은 사실 이 전에 야곱이 라반에게 썼던 표현이다. 개역개정에는 “내 아내를 주소서”(창29:21)라고 공손한 말투로 옮겼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라헬의 명령과 동일한 hāḇâ이다 – ‘내 아내를 달라’.
전에 야곱은 이 요구를 하기까지 라헬을 위해 칠년을 일하며 기다렸다. 그런 야곱에게 라반은 라헬 대신 레아를 신혼방으로 들여보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라헬은 야곱에게 아들을 요구하고 있는데, 결혼 이후 언니 레아가 이미 아들 넷을 낳은 후였으니, 어림잡아 야곱이 자기를 위해 기다린 시간만큼 기다리고 꺼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 라헬에게 야곱은 가히 배반적이라 할 만한 태도를 보인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2)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뿐이시라는 바른 대꾸를 하고 있기는 한데 그가 성이 나 있는 것은 아마도 ‘달라’는 라헬의 요구가 앞서 말 한 라반과의 사이에 있었던 치가 떨리는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자식을 ‘달라’는 라헬의 요구는 그렇지 않아도 라반의 부당한 처사로 말미암아 계속 위협받고 있는 복의 확신을 더욱 흔들어 놓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에서에게서 복을 빼앗았는데, 아내는 신혼 날 뒤바뀌고 품삯은 열 번이나 낮아지며, 사랑하지 않는 레아에게는 잘도 출생하는 자식을 정작 그가 사랑한 라헬에게는 안겨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모두가 이미 그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라헬이 던진“죽겠노라”는 한 마디는 그의 존재감을 뒤 흔드는 말이 되었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죽겠노라”는 이 말이 라헬의 입에서 터져 나온 순간, 야곱의 집은 자매간의 싸움을 넘어서 야곱과 에서 두 형제간의 다툼까지 다시 끄집어냈다. “죽이리라”(창 27:41) 벼르던 에서의 분노 – 그 소리가 이제 이 집 안방 주인의 입에서“죽겠노라”로 바뀌어 시기와 말의 폭력으로 야곱의 집을 에워쌌다.
그럼 레아가 야곱에게 건넨 말은 어땠을까?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창 30:16)
야곱이 에서의 복을 “빼앗”았듯이(창 29:36) 라헬 역시 레아에게서 남편을 “빼앗”았는데(창 30:15), 전에 야곱과 에서가 “팥죽”으로 장자 명분 거래를 했듯이 이제는 라헬과 레아가“합환채”(창 30:14)로 남편 거래를 해 레아가 야곱을 부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샀노라”로 번역한 말은 야곱과 라반이 서로간에 흥정한 “품삯”과 동일한 어근śkr에서 파생된 단어로서‘품군을 삼았다’는 뜻이다. 집에서도‘품군’으로 전락한 야곱. 그래서인지 그는 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얻는 내내 단 한 번도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다. 라헬이 죽고 나서 막내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꾼 것이 전부이다.
훔친 복으로 잘 살았어야 할 야곱. 도망침으로 새 삶을 살기를 꾀한 그. 그런 야곱에게 일찍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야곱의 삶과 그의 주변을 철저히 주장해 가신다 – 사면초가. 이 놀라운 섭리가 야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과 그 약속을 이행하심을 바로 목도하게 할 것이다.
spark4@gordonconwell.edu
10.2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