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중기 앗수르 법(MAL) 토판 A (독일 베를린 Vorderasiatisches Museum 소장; 공유 도메인).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 20:3).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랄 왕인 아비멜렉이 당시 아브라함에게서 사라를 데려가자(창 20:2) 하나님이 그에게 현몽하시고 이르신 말씀이다. 또 다시 아브라함이 사라에 대해 자기 누이라고 하여 초래된 사건이었다. 아브라함이 되어서도 아브람 때처럼 살고 있는 믿음의 조상이 한심하고, 거듭 이방 왕의 궁에 묶이는 사라가 참으로 안쓰러워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애굽에서 처럼(창 12:17), 이 번에도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야 했다: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 20:3).
고대 근동에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다른 남자가 데려갈 때 이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는 법적 전통이 있었던 것 같다. 앗수르(Assyria) 제국의 첫 수도였던 동명의 도시 앗수르(현재 Qal’at Sherqat)에서 발견된 중기 앗수르 법(MAL)에는 다음과 같은 법 조항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남자(그녀의 아버지도, 형제도, 아들도 아님)가 한 남자의 아내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떠나도록 주선한 경우: 그는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취지로 맹세해야 하며 남편에게 납으로 7,200세겔을 주어야 한다…”(MAL 토판 A, 22문단).
만약 남편이 있는 여자인 줄 알면서 성관계까지 가진 것이 의심된다면 보상금(납 7,200세겔)을 지불하게 한 후 그 남자를 강에서 시죄법으로 다스릴 것을 규정한다. 즉, 강물에 집어 던져 살아나면 무죄로 인정한다는 규정이다. 물론 이런 신명 재판에서 살아남는다면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중기 앗수르 법이 족장시대보다 후대에 기록된 법이긴 하나, 창세기 12장의 바로와 20장 그랄 왕 아비멜렉은 둘 다 중기 앗수르 법이 말하는 원칙, 즉, 여자에게 남편이 있는 줄 몰랐다면 이에 대해 맹세하고 그 여자의 남편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의 경우,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창 12:18)는 힐문이 곧 남편이 있는 여자인줄 몰랐다는 취지에 대한 맹세에 해당하고, 앞서 아브람을 후대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창 12:16)를 얻게 한 것이 곧 보상에 해당된다. 그리고는 아브람과 그 일행을 보냈다(창 12:20).
이와 유사하게 아비멜렉 역시 아브라함에게 힐문한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창 20:9-10). 즉,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몰랐다는 취지의 맹세다. 그리고는 보상한다: 양과 소와 종 그리고 은 천개.
아비멜렉의 경우 사라를 돌려보낼 뿐 아니라, 심지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랄 땅에 거주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한다(창 20:14-16). 이렇게 볼 때 아비멜렉의 행실은 당시 법을 적용했을 때 아무 하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애굽을 떠나게 한 바로와 달리 그랄 땅에 살라는 호의까지 베풀고 있기에 그의 행위는 그가 속한 전통의 틀에서 “의”롭다 간주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런 아비멜렉 앞에서 아브라함의 변명은 무색해진다: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 20:11). 자신이 사라에 대해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은 못하고 애꿎은 아비멜렉을 탓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반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창 20:4). 이와 유사한 질문을 우리는 이 전에 접한 바 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3). 바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중보하며 하나님께 드린 질문이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고 하나님과 변론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창세기 20장에서 우리는 아비멜렉의 자기변호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하나님은 이런 아비멜렉의 주장이 옳다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창 20:6). 하나님도 아비멜렉이 범죄하지 않았고 그 마음이 온전하였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반면 아브라함에 관해서는 그의 처사를 아무리 관대히 봐주려 해도 방법이 없다. 이미 “전능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이란 새 이름을 받기에 이르렀건만(창 17) 자신을 지킬 수단으로 “이복 누이”(창 20:12) 만능패(wild card)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그에게서 우리는 아직도 아브라함 이전의 아브람을 발견한다. 애굽을 떠났지만 여전히 애굽을 동경하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본다. 비록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었으나 여전히 옛 사람을 벗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를 본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창 17:4) 믿음은 있었으나 정작 자신의 안녕 때문에 사라의 남편으로서 나설 믿음은 없는 아브라함. 그런 아브라함을 대신해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 20:3).
그런데 진정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 개입하심이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한없이 초라해진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는 당신의 선지자라 하신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면 들으시겠다 하신다. 그러면 너를 살려두리라 하신다. 성경에 선지자라는 말이 사용된 첫 사례이다.
이 말씀을 따라 사라는 회복되었고 선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다”(창 20:17).
사라. 혼인의 언약으로 한 몸을 이룬 그녀는 “아내”였다. 그를 더 이상 “이복 누이”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의 남편 아브라함. 피의 언약으로 “전능한 하나님”의 백성된 그는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랄에서의 사건은 이 부르심이 결코 그의 자격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 것임을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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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