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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땅 (14) - 접속사 ‘레마안’

박성현 박사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날이 뜨거운 어느 하루, 장막 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곧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 18:2) 그들을 장막으로 청해 융숭히 대접했다. 

일 년 뒤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을 남기고 이제 그 일행이 길을 나서는데,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온 아브라함에 대해 여호와께서 문득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b)

그다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 여호와께서 “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었고 그 두 성의 “모든 행한 것이 과연” 여호와께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고자 하셨다(창 18:21). 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비는 아브라함의 중보로서,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창 18:24)로 시작해 의인 오십 명에서 사십 오명으로, 다시 사십 명으로 또 삼십 명, 이십 명, 그리고는 십 명까지 이어져,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32절)는 약속을 받으며 마쳐진다.

이 위대한 중보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접속사의 역할이다.

성경의 뜻을 잘 살피고자 할 때 종종 우리는 본문에서 접속사가 갖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곤 할 것이다. 창세기 18장의 접속사 ‘레마안’이 그렇다. 

레마안(ləmaʿan). 전치사 lə가 명사 maʿan에 접두사로 붙은 형태로 이루어진 이 접속사는 창세기 18장에 세 번 사용되었는데, 그 각각의 용례를 살핌으로써 우리는 본문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약속과 관련해 본 장이 기여하는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1. “하려고”

 

첫째, 우리는 ləmaʿan이 이끄는 목적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는 책임과 목적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창세기 12장 2-3절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약속하신 바 있다. 그 약속은 창세기 18장에 다시 언급됨과 아울러 여호와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셨는지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7b-18)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큰 민족, 복의 근원이 될 약속을 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감추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약속에는 뚜렷한 목적과 책임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ləmaʿan)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a)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의 ‘행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복의 약속을 받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18:19a 본문에서 저자는 접속사 ləmaʿan이 이끄는 목적절을 통해 두 가지를 분명히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는 책임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아브라함이 자식과 권속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할 목적을 위해 택함 받았다는 것이다.

 

2. “이는”

 

둘째, 이 약속의 성취는 앞서 언급한 책임과 목적에 따른 결과일 것임을 말씀한다:

 “…이는(ləmaʿan)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b)

원문상에서 이 문장은 ləmaʿan으로 시작하는 목적절인데 애석하게도 한글개역개정을 통해 원문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ESV를 보면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so that (ləmaʿan) the LORD may bring to Abraham what he has promised him.”

다시 한번, 우리는 자칫하면 여호와께서 창세기 12장 2-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 약속이 무조건적으로 성취되어질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18장 19절은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말씀한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자식과 권속을 가르칠 책임이 있어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할 목적을 위해 택함을 받았고, 그리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창세기 12장 2-3절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3. “위하여”

 

이렇게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에서 자신의 부르심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의와 공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듣게 되는데, 이런 그의 부르심의 목적이 분명해진 후 바로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다음 질문을 여호와께 아뢴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ləmaʿan)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창 18:24).

이 절에서 ləmaʿan은 19절과 다르게 접속사가 아닌 복합전치사로 사용되는데, ‘때문에’가 아닌 “위하여”의 뜻을 가지며 이 점을 개역개정이 잘 옮기고 있다. 오십 의인 ‘때문’(because of)이 아닌 그 오십 의인을 ‘위해’(for the sake of) 심판을 재고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내용이다. 이유가 아닌 목적 – 이것이 아브라함의 중보의 바탕이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자격이 아닌 ‘위함’ –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의인됨으로서의 자격이 아닌, 오직 의인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고,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토대로 중보했고, 결국 아브라함의 중보에 계속 양보하듯 읽히는 하나님의 답은 그 정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창 18:26).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큰 민족, 복의 근원의 약속 또한 예수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의 기도 역시 메시아 예수의 사역 속에 그 의미를 갖기에 이른다

 

4. 마치는 말

 

훗날 역사가 증언해 주었듯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고자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은 예수 안에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에게 주어진 큰 민족, 복의 근원의 약속 또한 예수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었고,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의 기도 역시 메시아 예수의 사역 속에 그 의미를 갖기에 이른다. 창세기 18장에서 우리는 그 시작의 구성을 문법의 틀을 통해 조금 더 분명히 볼 수 있다.

spark4@gordonconwell.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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