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메이쳔이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보내 20년의 시간은 현대주의자들(Modernists, 혹은 자유주의)과 싸우면서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지켰고 든든히 세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메이쳔을 근본주의(fundamentalist)자라고 칭했지만 그러나 메이쳔은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아니했다. 근본주의라는 칭호는 자유주의 물결이 유럽에서 미국교회에 거세게 몰아칠 때에 1895년도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나이아가라(Niagara)에 모여 성경에서 근본교리를 중시하여 5가지를 선정하였는데, 그것은 1)성경의 무오설 2)예수의 처녀 탄생 3)예수의 대속적인 죽음 4)예수의 몸의 부활 5)예수의 육체적 재림이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정통적 기독교 신앙을 사수하기 위해 1909년부터 ‘The 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 책을 출판하여 보급하였다.
그러나 메이쳔은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주의자로 칭함을 받기 싫어하였다. 그 이유들은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역사적인 안목이 부족하고(the absence of historical perspective), 학문적인 깊이가 부족하며, 기독교 교리와 신조의 다양성을 부인하며,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강조하며(특히 주초문제가 경건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함), 세상의 문화적인 변화를 무시하며(a lack of effort to transform culture), 종말론의 천년왕국을 너무 강조하여 보수 정통주의 교회들 사이의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문제는 메이쳔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메이쳔 자신이 근본주의자가 아닌 이유를 신학적, 철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일관된 정통적인 기독교는 개혁주의 신학이나 혹은 칼빈주의 신앙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스스로를 ‘근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내가 내 자신을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칼빈주의자, 즉 ‘개혁주의자’이다”(Thoroughly consistent Christianity, to my mind, is found only in the Reformed or Calvinist Faith; and consistent Christianity, I think, is the Christianity easiest to defend. Hence I never call myself a “Fundamentalist”....what I prefer to call my self is not a “Fundamentalist” but a “Calvinist”–that is, an adherent of the Reformed Faith).
근본주의자가 아닌 개혁주의자 자처, 자유주의는 별개 종교로 선언
기독교 역사성 강조, 증거주의 변증학,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믿어
메이쳔은 “어거스틴과 칼빈을 통해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게 계승되어진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곧 나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메이쳔은 자신을 근본주의자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Ned B. Stonehouse, J. Gresham Machen: A Biographical Memoir, p. 85).
메이쳔이 자유주의(현대주의) 신학의 도전은 곧 정통 개혁주의신학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해서 열심히 싸우면서 진리를 사수하면서 지은 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책이 1923년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published in 1923)이다. 이 책에서 메이쳔은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한 분야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종교”라고 했다.
자유주의와 기독교는 그 뿌리가 다른 두개의 별개의 종교라고 했다(“not two varieties of the same religion, but two distinct religions proceeding from altogether separate roots).
메이첸은 당시 크게 번성하고 있던 자유주의(현대주의)신학의 뿌리는 자연주의(naturalism)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책 1장에서 자연주의란 “기독교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개입했음을 부인”(as opposed to “the entrance of the creative power of God”)하는 입장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리고 위대한 구속의 종교와 자연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신학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라는 그 유명한 선언을 한다.
메에쳔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교리와 이론을 논박함으로써 기독교의 정통 가르침을 강력하게 변호했다. 자유주의는 이성과 과학의 뿌리에서 출발하며,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복음진리를 현대 세계관과 타협함(compromising the gospel to the modern worldview)으로 생겨났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the supernatural component of Christianity)들을 제거하고,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구속사건(the authority of the Scriptures and the redemptive account of Christ’s work)을 포기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그리고 메이쳔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의 저서 ‘역사와 신앙’(History and Faith)에서 그는 성경의 모든 사건은 역사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은 일어난 일은 역사에 대한 기록이며,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다”(Machen, History and Faith, p. 338). 곧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해되어야한다.
구속사에서 전개되는 역사는 모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사건들이다.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적도 역사성을 지닌다. 여기에서 자유주의와 싸우면서 기독교의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를 강조한다. 신약의 모든 기적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심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위한 증거들이다.
메이쳔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모두 역사적인 사건임을 강조한다. 메이쳔은 기독교는 역사적이며, 초자연주의이기 때문에 자연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는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앙과는 뿌리가 다름을 강조한다.
메이쳔은 신약 신학자이었지만 그러나 신앙을 변호(the defense of the faith)하는데 전심을 다했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기독교 교리를 잘 설명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나아가서 메이쳔은 기독교 신앙을 위대한 사상 체계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마치 16세기 종교개혁과 비슷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렇게 실행했다(David Wells edited,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p.111).
메이쳔이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앙을 변호하는 일의 기초는 철저하게 성경이었다. 그는 신구약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임을 확신하는 믿음의 전제하에 기독교 신앙의 변증을 시도했다.
메이쳔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메이쳔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굳게 믿었다. 그는 “세상은 타락하며 가시적인 교회는 상당한 정도로 배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 확고하게 선다”는, 메이쳔의 신앙의 변증의 기초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는 강의, 설교 및 라디오연설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한다”며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초청한다.
메이쳔은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면서 문법적-역사적 접근 방법(grammatico-historical approach)과 일반상식(common sense)을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며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특별히 메이쳔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성서비판학자인 빌헤름 헤르만(Wilhelm Herrmann) 교수를 만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을 더욱 논리적으로 잘 비판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헤르만 교수를 존경했지만 그의 신학은 따르지 아니했다.
사실 당시에 문법-역사적인 방법(grammatico-historical approach)을 통해 성경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주로 자유주의신학의 성경해석방법이었지만 그러나 메이쳔은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신약성경의 역사적 사건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메이쳔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토마스 리드의 “스코틀랜드의 보편철학”(Thomas Reid’s Scottish “Common Sense Philosophy)을 이용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판했다.
“스코틀랜드의 보편철학”을 사용하는 방법은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변증학의 용어로 말하면 증거주의 변증학(evidential apologetics)인데, 메이쳔이 세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반틸 교수에 의해 가르쳐지는 변증학은 증거주의가 아닌 전제주의 변증학이었다(presuppositional apologetics). 반틸 교수에 의해 확립되어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학의 전통은 전제주의이며, 이것은 프린스턴 신학의 전통이 아니라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의 전통을 따랐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찰스 하지, 워필드)이 성경의 무오성을 증명하는 방편 중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항은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때문에 성경무오설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이 믿고 있는 신앙과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 교수(예일대학),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지적한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신합리주의를 낳았고, 그 결과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은 정통적인 개혁주의 전통을 변질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Sydney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메이쳔 교수가 단지 역사적-합리적인 논증으로만 불신자들을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다고 믿지 아니하였다. 메이쳔은 사람이 중생함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주장했다.
인간의 지성은 죄로 말미암아(noetic effect of sin) 복음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면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메이쳔의 변증학이 합리주의에 근거하였다고 할 수 없고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며, 칼빈주의에 입각한 변증학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쳔이 프린스턴신학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프린스턴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워 (구)프린스턴신학, 정통적인 개혁주의신학을 계승하여 오늘까지 오고 있다.
지금도 메이쳔 교수가 가르친 칼빈주의 정통 개혁주의 신학은 전세계적에서 힘있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신학적인 기초를 놓은 박형룡 교수, 박윤선 교수도 미국에 유학하면서 메이쳔 교수로부터 개혁주의신학을 가르침을 받아 한국교회에서 한평생 칼빈주의 정통 개혁주의신학을 가르쳤다.
다음 회에는 개혁주의 신학자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에 대해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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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