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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샴 메이쳔(Gresham Machen)(상)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미국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레이샴 메이쳔이다.

메이쳔은 1936년 12월 31일, 필라델피아 집에서 1500마일 떨어진 노스다코다(North Dakota)의 몇 교회들에 설교하기 위하여 갔다가 급성폐렴으로 그곳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튿날 1937년 1월 1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동료교수인 존 머리(John Murry)에게 아래의 내용으로 전보를 쳤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때문에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그 순종이 없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I’m so thankful for active obedience of Christ. No hope without it). 그리고 몇 시간 후 1937년 1월 1일 오후 7시30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Ned B. Stonehouse, J. Gresham Machen: A Biographical Memoi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성탄절 휴일로 쉬고 있을 때에 메이쳔 박사는 쉬지 아니하고 화씨 -20도의 추운 날씨인 노스다코다의 교회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방문한 가운데 이러한 사건이 생겼다. 

메이쳔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시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 왜냐하면 메이쳔이 세운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출발한지 8년밖에 되지 아니했고(1929년 founded), 그리고 그가 세운 정통장로교회(OPC) 교단도 세워진지 1년밖에 되지 아니하였고(June 11, 1936년 founded), 메이쳔이 1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메이쳔이 세운 독립장로교 해외선교부(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도 세워진지 4년 밖에(1933 founded) 되지 아니하였다.   

앞으로 해야 할 이들이 너무나 많이 쌓여 있었고, 또한 그 당시 가장 뛰어난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최전선에서 정통신학을 방어하는 가장 뛰어난 전사(warrior)인 메이쳔이 56세에 세상을 떠난 것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신앙의 정통성 지키고 자유주의신학 위험성 가르치며 비판한 지도자

1928년 정통개혁주의 포기한 프린스턴신학교 재편 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 

정통장로교회(OPC) 교단, 독립적선교부(IBPFM) 설립 정통신학이어가

 

당시 20세기 초기 미국 교회의 상황은 유럽에서 밀려온 성경의 고등비판(Higher Criticism), 무신론적 진화론(atheistic evolution), 그리고 막스주의 사회주의(Marxist & socialist) 사상들이 미국 교회를 총 공격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신학교들은 이미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다 넘어갔지만 프린스턴신학교는 정통 개혁주의신학의 요람이 되었는데, 이제는 프린스턴신학교 이사회가 메이쳔을 교수직에서 박탈했기 때문에 프린스턴까지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당시 정통신학을 비판하는 여러 종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일반적으로 “현대주의자” Modernist로 불리웠고, 현대주의 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자들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 fundamentalist로 불리웠다).

메이쳔은 원래 신약 신학자이었지만 그가 변증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러한 시대적인 환경 때문이다. 메이쳔은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키스대학에서 고전어를 전공했다. 메이쳔은 성경 원어의 지식이 뛰어났다. 메이쳔이 지은 헬라어 교과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신학교에서 헬라어 교재로 사용한다. 존스홉킨스대학교를 졸업한 후 메이쳔은 프란시스 패튼(Francis Patton)과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에게 배우기 위하여 프린스턴으로 갔다. 메이쳔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 말부르그(Marburg)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계속해서 공부했다. 

메이쳔이 독일에서 수학하는 동안 아돌프 쥴리처(Adolf Julicher),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 그리고 부셋(W. Bousset)과 같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거장들과 만나게 된다. 물론 메이쳔이 신학적 입장은 그들과 다르지만 그러나 메이쳔이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을 더욱 깊히 있게 연구할 수 있었다.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신학을 잘 알아야한다.

메이쳔은 1906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암스트롱 교수를 돕는 조교로 임명되었다. 메이쳔은 1906년부터 나중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해임될 때인 1929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프린스턴에서 메이쳔은 1907-1908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과목을 가르쳤고, 1930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1914년 5월 신약담당 부교수로 임명되었고 1915년 5월 신약교수로 취임했다. 1922년 10월 9일 “바울 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 책이 출판되었다. 

1926년 5월 메이쳔은 변증학 주임교수로 선출되었다(Machen elected by Directors to the chair of Apologetics). 그러나 1926년 여름 장로교 총회는 메이쳔의 변증학 주임교수 임명을 연기했다. 왜냐하면 이미 미국장로교회 총회(당시 미국북장로교회, PCUSA)와 프린스턴신학교 이사회에는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점점 높아졌고 이들은 보수주의자 메이쳔을 멀리하는 분위기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922년 5월 21일 헤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목사가 First Presbyterian Church(맨하탄 소재)에서 역사적인 설교를 하였다. 제목은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ists Win?”). 포스딕의 이 설교는 당시 장로교 안의 보수주의 자들, 특히 메이쳔을 비판한 설교이었다. 이미 미국장로교회는 자유주의신학과의 타협이 교단적인 중론이 되었다. 소위 교단의 통일성(unity), 화합,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당시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이었던 미국장로교회(PCUSA)가 현대주의(자유주의)에 대한 포용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중론이 되었다.

그 당시 “어번 선언”(The Auburn Affirmation, 1924년)과 “어드만과 메이첸의 논쟁” (Charles Erdman, prof. of practical theology) 등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의 핵심은 미국장로교회 총회(당시 북장로교회)가 1910년에 결의했던, ‘근본주의 5대 강령 (The Fundamentals)을 재확인하는 것을 반대하는 선언이다. 근본주의 5대 강령을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무효화 시키는 일이다. 근본주의 5대 강령은 1)성경의 무오성 2)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예수님의 대속적 죽음 4)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성 5)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다.

1910년에 미국장로교 총회가 이 강령을 결의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미국장로교회의 목사들이 이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분위기는 기독교 근본교리 5가지를 교단의 통일성과 화합을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여겨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이 교리를 교단의 화합을 위해 포기하였다(교회를 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교회의 교리적인 순수성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에 되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앙고백, 즉 교리를 인간적인 편리를 위해서 타협하지 말아야한다).

물론 어번 선언”(The Auburn Affirmation, 1924년) 중심에는 헤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목사 사건이 있었다. 포스딕은 당시 맨해튼의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장로교 내에서 자유주의신학을 퍼뜨리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노회와 총회가 포스딕의 신학사상을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결국 노회와 총회는 포스딕 쪽으로 기울어졌고, 포스딕과 자유주의신학을 반대하면서 성경의 무오성과 정통신학을 주장하는 메이쳔은 미국장로교 총회 내에서 점점 소수로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1926년 총회를 기점으로 미국장로교회는 정통 보수신학을 포기하고 교단의 화합을 위해 자유주의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역사학자 마스덴(Marsden)는 “당시의 대부분의 미국장로교 교인들은 현대주의자들도 아니고, 근본주의자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교단의 하나됨을 위하여 평화와 관용을 위한 제안들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결국 대부분의 미국장로교회의 교인들과 목사들은 교단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서 신앙의 순수성과 믿음의 정통성을 자유주의 자들과 타협하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자유주의신학에 조그만 문을 열어놓고 타협하면 결국 정통 개혁주의신학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 사실은 메이젼이 지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진다. 결국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닌 인간이 만든 다른 종교가 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끝까지 열정적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고,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을 가르치며 비판한 지도자가 그레샴 메이첸이다. 

메이쳔은 자유주의자(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 수많은 저서들과 논문들을 남겼다.

한편 1928년 세인트 폴(St. Paul)에서 열린 미국장로교회 총회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정통 개혁주의를 포기하는 내용의 재편을 결의했다(당시 총 결정의 결과: 재편 찬성이 50%, 반대 30%, 기권 20%, the reorganization of the seminary was approved). 이제 메이쳔은 더 이상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프린스턴신학교 이사회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장악이 되었고, 정통 개혁주의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점차적으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첸이 프린스턴을 매우 사랑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정통적 기독교 진리와 개혁신학을 지키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학교를 졸업한 자들이 미국장로교회에서 안수 받을 수 없었고 사역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메이쳔은 어쩔 수 없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신학 입장을 같이 할 수 있는 교단인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만들었다. 사실 메이쳔의 뜻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정통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난후에 미국장로교회(PCUSA)에 목사로 사역하면서 교단을 개혁하기를 원했지만 교단의 정치적인 권력은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미국장로교(당시 북장로교, PCUSA) 선교부 소속 파송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소설가 펄벅(Pearl Buck)이 Christian Century 잡지에 자유주의 입장에서 선교에 대한 글들을 기고했다. 펄벅은 그리스도의 인격까지 부정하면서, 신약의 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인격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신비한 개념과 관념으로 글을 썼다(New Testament message as a mystical concept of Christianity, rejecting even the need for the historic pers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인격의 역사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역사성의 필요성을 거절한 글들이다(David F. Wells,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p.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역사성까지 부인하는 펄벅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지원하면서, 정통신학을 공부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들을 선교사로 파송을 거부했다. 메이쳔은 이 사실을 장로교 총회에 항의했지만 그러나 총회는 선교부의 입장을 재확인했고, 메이쳔의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에 1933년 새로운 선교부, 즉 교단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선교부(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를 설립해서 선교사역을 계속했다. 

KHL0206@gmail.com

03.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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