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미국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예일과 엔도버 신학교는 모두 자유주의 신학으로 흘러갔지만 프린스턴신학교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을 든든히 지켜 나갔다. 당시 유럽에서 건너온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미국 전체에 거세로 몰려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벤자민 워필드는 프린스턴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막아내었고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든든히 세워 나간 그 위대함을 살펴보자.
워필드는 찰스 하지의 신학을 계승 보존하였다. 워필드는 대표적인 저작은 없지만, 그러나 20년 넘게 Princeton Review의 편집자로서 워필드는 온갖 종류의 도전과 비판으로부터 전통적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을 잘 방어하였다.
특별히 워필드는 그 시대에 성경의 무오성에 도전하는 여러 종류의 성경 비판학의 이론에 맞서 성경의 신뢰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변증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화란에서는 바빙크가 과학적 자연주의(Scientific naturalism), 신학적 자유주의(Lheological Liberalism),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 이성(autonomous human reason)에 기초한 사상으로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권위를 비판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열심히 싸웠고, 바빙크는 성경의 무오성과 개혁주의 신학을 잘 방어하였다.
일반적으로 워필드(Benjamin Warfield, 1851-1921), 화란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당시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불리워졌다.
워필드에 대한 좋은 연구 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Fred G. Zaspel의 ‘The Theology of B. B. Warfield: A Systematic Summary’ △Kim Riddlebarger의 ‘The Lion of Princeton: B.B. Warfield as Apologist and Theology’ △Paul Helm "B.B. Warfield’s PathtoInerrancy: An Attemptto Correct Some Serious Misunderstandings”(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72 (2010): 23-42).
워필드는 펜실베니아주 Allegheny에 있는 Western Theological Seminary(지금은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구약성경 교수직을 처음 제안 받았지만 그의 주요 관심이 신약성경 연구였기 때문에 본인이 수락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1877년 가을, Western의 신약성서 교수인 Samuel T. Lowrie가 사임했을 때 워필드는 이듬해 가을에 교수가 되었고, 곧 신약성서 문학 및 주석 교수(professor of New Testament Literature and Exegesis)가 되었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성경의 무오성 교리(the doctrine of Scripture)를 변증했다. 그의 주제 발표 제목은 “신약성서 전체 영감에 관한 교회의 교리가 현대 성서비평의 확실한 결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습니까?”(Is the Church Doctrine of the Plenary Inspiration of the New Testament Endangered by the Assured Results of Modern Biblical Criticism?)였다.
프린스턴에서 자유주의신학 물결 막고 개혁신학 세워
스코틀랜드 칼빈주의 개혁신학 전통 따른 ‘증거주의’ 변증학 주장
카이퍼와 접근방법 달라 후진들에 의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분리
성경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완전히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은 절대적으로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주장했다.
워필드는 신약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다른 분야의 학문을 겸비하였고, The Presbyterian Review 저널에 많은 논문들을 기고함으로 이미 프린스턴신학교와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워필드의 마음은 프린스턴에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멘토인 A. A. 하지가 사망했을 때 프린스턴에서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워필드는 1887년 가을학기부터 프린스턴신학교의 변증신학 교수(Professor of Didactic and Polemic Theology)로 임명되는 것을 수락했다.
워필드는 34년 동안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가르쳤고 신학교 저널을 편집했으며 수많은 논문, 찬송가, 시, 1200개 이상의 서평을 썼고 교수진을 주재했으며, 동창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캠퍼스 안과 밖에서 많은 설교를 했다. 워필드는 Alexander Hall 옆에 있는 신학교 캠퍼스의 Hodge House에서 살았다.
프린스턴에서 강의하는 동안 그는 1892년 뉴저지대학(프린스턴)과 데이비슨대학에서 LL.D.(명예법학박사), 1911년 Lafayette College에서 D.LL(명예문학박사), 그리고 1913년 화란의 위트레흐트대학교(UNIVERSITEIT UTRECHT)에서 신학박사(STD)를 받았다.
워필드는 주요 신학적 관심분야는 기독론, 칼빈과 어거스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완전주의, 펠라기우스주의, 진화론, 신약, 성경론이었다. 이중에서 오늘날까지 크게 영향을 끼치는 분야는 성경론(the doctrine of Scripture)이다.
워필드는 성경원본(original autographs)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변호하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특별히 성경의 영감(revelation and inspiration)에 대한 그의 학구적인 열정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워필드에 의하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이며,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다. 워필드의 이러한 견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표준문서와 일치한다. 워필드의 성경 교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시며 불변하시는 속성에 기초하고 있다. 전혀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 자체가 오류가 없으며 정확 무오하다.
워필드는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디모데후서 3:16에 나오는 헬라어 단어, θεόπνευστος(Theopneustos, God-breathed)에 집중한다.
워필드는 헤르만 크레머(Hermann Cremer)가 출판한 헬라어 사전에서 “θεόπνευστος”(하나님의 감동으로) 단어를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역의 의미인 “하나님의 감동으로”를 부정하고, 오히려 “독자들을 감동하는” 의미로 매우 고극적인 의미로 설명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성경의 영감을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반응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워필드는 다른 여러 사전, 고대사본들, 신학문헌 및 성경에서 증거를 제시하면서 “θεόπνευστος”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인간 저자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무오하게 기록했다 논증하면서 성경의 무오성을 변증했다(“God-Inspired Scripture,”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 11:41 (Jan. 1900): 89-130).
“θεόπνευστος”는 “하나님의 감동으로”(God-breathed)이며,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숨결로서 창조되었다(produced by the creative breath of the Almighty).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감된 기록이다.
성경의 기원이 성령의 역사에 있으며 가장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성경의 모든 고상한 속성이 세워진 것은 바로 이 신성한 기원의 기초 위에 있다. 성경은 가장 높은 하나님의 속성위에 세워진 신적 기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It is on this foundation of Divine origin that all the high attributes of Scripture are built) (Ibid., 130).
워필드는 “하나님의 감동”을 “가장 높은 하나님의 속성”(all the high attributes) 위에 세워진 것을 강조하며, 이 용어는 하나님이 숨을 내쉬실 때 하나님과 성경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이러한 워필드의 성경의 영감론은 역사적으로 믿어온 정통적인 성경의 영감론과 일치하며 성서 비판론자들에 대하여 성경의 무오성을 변증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워필드의 변증학에 대해서 살펴보자. 워필드와 바빙크의 변증학의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두 분 모두 훌륭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다.
워필드는 화란 개혁신학보다 스코틀랜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른다. 워필드는 변증학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 방법에 대해 화란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와 접근 방법이 다르다.
워필드는 “증거주의”(evidentialism) 변증학을 가르쳤지만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 Apologetics) 변증학을 발전시켰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워필드의 변증학 방법론의 차이는 나중에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큰 논쟁이 되었고 차이의 범위는 크게 확장되었다.
1929년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는 분열되었고 전통적 칼빈주의 및 개혁주의를 지킨 훌륭한 신학자들은 필라델피아에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했고, 이 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친 젊은 신학자는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이었으며, 반틸은 워필드의 증거주의 변증학이 아니라 화란의 카이퍼와 바빙크의 전제주의 변증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큰 틀에서 보면 화란의 카이퍼, 혹은 프린스턴의 워필드 모두 훌륭한 개혁신학자들이다. 이들의 전통은 모두 계승되어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워필드로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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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