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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의 회복, 영적전투의 승리 –진리의 혼합, 영혼의 곤고함, 인식과 의식–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전남수 목사

영적 전투, 진리의 혼합

 

얼마 전 서울 곳곳에 있던 방공 대피소가 무용해졌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이젠 그렇게 피할 필요도 피할 수도 없는 전쟁의 전후방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영적인 전투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특별히,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기계문명을 통해서 교묘히 침입해 들어오는 영적인 어둠의 세력과 죄악의 문제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불어 곳곳에서 패전의 결과들이 많이 들려오는 것을 본다. 

에베소서 4장 18-19절의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에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설명하는 영적싸움의 실패 현상이 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몰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살도록 미혹하는 존재가 있는데, 어둠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주를 아는 순간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감각해지고, 원수 되었던 어둠의 세력과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마침내 기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어둠의 세력은 사람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디를 공격하고,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떤 때는 사자처럼 핍박과 고난으로, 어떤 때는 유혹과 쾌락으로, 어떤 때는 안일함과 게으름으로, 어떤 때는 교만과 시기케 함으로, 등. 신자의 삶을 속이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 근본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영적 빈곤함이 있다.

 

영적 갈증과 빈곤함

 

영혼의 갈증과 빈곤함이 해소되지 못하면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게 된다. 영혼은 너무나 빈곤하기 그지없어서, 무속카드의 작은 종이 조각 하나에 존재와 운명을 맡기려는 나약함으로 떨어져 버린다. 아니면, 아무런 절제와 변별력도 없이 재미를 목적으로 하는 문명의 작은 도구에 마음과 시선을 다 뻬앗겨 버리는 것이다. 영적전투의 패배를 시작하는 표징이다.

영적인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볼 것은 ‘의식하는 것’이다. 의식하고 다루어야 한다. 악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받지 않을 때 사람들은 대개 이를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점점 구체적으로 나의 삶을 비집고 들어온 뒤에야 깨닫게 되는데 그런 경우 이미 늦었을 때가 많다. 

 

죄에 대한 인식과 의식

 

무엇보다 분명히 존재하는 힘인 죄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의식해야 한다. 거짓을 진리처럼 믿게 만들고 거짓에 대한 개념 자체를 잊어버린 채, 거짓의 아비 사단의 조종 가운데 살도록 만드는 것을 의식해 내야 한다. 

거짓의 실체는 사단이다. CS 루이스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나쁜 길이 아니라, 아주 부드럽고 좋은 내리막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길인들 뭐하겠는가? 목적지가 지옥가는 길이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 한순간에 거짓이 찾아오고 거짓에 싸여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의식없는 사단의 놀잇감

 

의식하면서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데릴라의 유혹에 잠든 동안 삼손의 머리카락은 잘려나가고, 영적인 힘들이 쭉 빠져나갔다. 그리고 눈이 뽑히고 몸이 묶인 상태에서 저들 이방 신상과 저들을 섬기는 이방인들 앞에서 춤까지 추는 온갖 수모와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삶도 믿음의 여정이었다고 고백하지만, 그러한 인생의 결론은 나실인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의식하지 못하고 무감각함으로 사단의 놀잇감이 된 것이다. 

살아있는 나무가지를 칼로 베어보면 진액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마른 나무는 아무런 진액도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땔감으로 적격일 따름이다. 비가 많이 온 후에도, 불을 피워보면 아무리 젖었다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활활 다 타버리고 만다. 그러나 살아있는 가지의 나무는 아무리 청명한 날씨에 불을 붙여도 잘 타지를 않음을 본다. 

주님은 우리를 포도나무 되신 당신의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 오직 의식하며 주님께 붙어 있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붙어 있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식하고, 영혼의 전투에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붙어있지 못함의 결과는 비참하다. 열매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발에 밟히고 땔감 외에는 쓸모가 없다.

 

인생의 빈들, 세겜의 유혹

 

세상과 그 배후의 영적 존재와의 전투를 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것이 근본적인 삶의 회복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출발이 됨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야곱이 형님과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의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챈 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하란의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의 집을 향해 가는 피신 길에 루스 땅을 지나며 잠이 들었다. 

'루스’라는 지명의 뜻은 ‘길을 잘못 들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행자들이 길을 잃기 쉬운 지형인 곳이다. 이곳에 잠든 야곱의 모습은 길 잃어버리기 쉬운 인생길에,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돌 베게 위에 머리를 고인 우리의 나그네 인생을 정형화한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기업의 언약을 재확인 시켜준다. 야곱은 하나님앞에 신앙의 결단과 서원을 드리게 된다. 길 잃어버리기 쉬운 루스가 하나님의 집 – 벧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금 그의 삶은 하나님을 중심에 만난 자의 삶이라기보다는, 목적한 여인을 아내로 얻기 위해 몸부림치고, 거부가 된 이후에 돌아와서는 즉시 벧엘로 올라감이 아니라 눈앞에 보기 좋은 세겜 땅에 거하다가 가족 멸절의 위기까지 보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다시 루스의 빈들 같은 상황을 세겜에서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집-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회복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삶의 전부를 회복시키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이어가게 하셨다. 

의식 없는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다시 의식을 회복하며 변화된 인생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당신의 벧엘은 어디인가?

 

루스와 세겜같은 세상의 빈들에서 벧엘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의 루스와 세겜 그리고 벧엘이 어디인가? 루스가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변화되었지만,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그곳이 벧엘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 벧엘이 주님이 임재하시는 곳, 무엇보다 주의 교회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곳이나 있지만, 가장 선명하고 분명하게 우리를 영적으로 무장케하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주님의 교회이다. 이곳이 벧엘이고, 이곳에서 예배할 때, 우리는 새생명 가운데 날마다 호흡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예단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섬기는 로컬 처치, 나에게 있어서는 알칸사 리틀락의 제자들 교회이다. 주의 몸된 교회에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드려지는 예배가 인생의 회복의 길과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찾고 구하고 생각하여 보아도, 영혼의 갈증이 해소가 되지 않으면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혼은 빈곤하기 그지없어서, 작은 카드 종이 하나에 청춘의 운명을 맡기려는 나약함과 아무런 절제 없이 문명의 작은 도구 하나에 온갖 마음과 시선과 영혼을 다 뻬앗겨 버리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무엇으로 회복이 될 것인가? 거친 사막 광야 같은 루스의 빈들에서, 세겜의 달콤한 유혹의 현장 속에서 나의 벧엘을 회복하고, 그 벧엘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게 될 때, 분명한 승리-삶을 드릴 서원이 있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배와 교회는 신앙생활의 핵심

 

교인들 중에는, 교회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말의 주장이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의 결정들을 어거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한 주장의 결과 교회와 예배를 경홀히 여기고 마침내 복된 성도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은 비교할 수 없다. 구원의 은총과 자비를 경험한 복된 성도의 삶은 항상, 주의 성전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사람으로, 성공적인 예배자의 삶을 살아간다. 세상 좋은 곳에서의 천날보다, 비록 초라하고 연약해 보여도 주의 전에서의 예배하는 하루를 복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삶은 교회와 함께 시작해서 교회와 함께 살고 마침내 교회와 함께 끝나는 삶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한가운데 항상 교회가 존재한다. 이것이 복된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전인 교회를 향하는 신앙, 무슨 일을 만나든지 교회로 피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교회로 피할 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고 준비하셔서, 마침내 승리자의 인생으로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3.0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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