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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 회복 및 부흥(復興)”(27)

김경일목사

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3)성경적 문화관(Biblical Cultural View)의 회복과 부흥 

 

청교도 문화는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저술이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정착 1세기 동안 엄청난 양의 저술을 생산했는데, 설교들과 신앙논문들, 역사에 관한 저작들, 전기들, 자서전들, 시들이 있다. 

(1)음악, 그림, 연극(Music, Painting, Theater)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고도의 기능과 미적 감각을 가지고 미국에서 가구, 도자기, 유리제품, 의상, 미술, 그리고 모든 종류의 가공품들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세련된 안목과 때로는 우아함까지도 나타낸다. 

17세기 청교도들은 사랑과 음악이 본질적으로 나쁘다거나 레크리에이션이 죄가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라이트(Wright)는, “뉴잉글랜드에서 음악은 청교도 예배에서 제한된 역할만을 담당했는데, 그렇다고 청교도들이 음악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에서 음악과 미술을 반대했던 것은 카톨릭 전통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또한 말씀 전파가 예배의 초점이 되게 하려는 열망에서였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예배에서 찬송을 부르는 것을 허용했지만 악기의 반주 없이 불러야 했다. 오르간, 전문음악가, 라틴어 찬송들은 청교도 예배에 발붙일 곳이 없었다. 초기 뉴잉글랜드인들은 여러 가지 성악을 즐겼는데 단, 가사가 “음탕하거나 호색적”이 아닌 것이었다.” 또한 청교도들이 대부분의 종교적인 미술을 “로마카톨릭적”이고 참된 믿음의 장애물로 거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비종교적인 미술까지 혐오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비석들에 상당히 기괴한 상징적 조각들을 새기는 것을 싫어했다. 

17세기 내내 뉴잉글랜드에서 배우들과 연극은 환영받지 못했다. 청교도들은 그 장소를 본질적인 악으로 보았다기보다는 시간을 낭비하는 곳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뉴잉글랜드뿐만 아니라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역시 연극을 천박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금지시켰다. 특별히 청교도들이 카니발이나 축제 때, 또는 무도회나 카드놀이에서의 외설을 공격했던 것은 영성유지를 위해 당연하고 필요한 조치였다. 

(2)오락(娛樂, Amusement)

특정한 오락 활동들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부적절한-부도덕하고 유해하고 단지 시간을 허비하게 함으로 게으름을 조장하는-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7세기 청교도들은 도덕적으로 해이된 시대에 있어서 버팀목 효과를 가졌다. 청교도는 그의 시대의 방탕과 경솔에 대한 등불과 허리 띠 역할을 했다. 

레란드 라이큰(Leland Ryken)은 “청교도들은 오락에 대한 생각에 있어 극도로 실용주의적이어서 여가 활동을 스스로를 위해 즐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세계관은 그 사회의 문화생활과 오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헌신과 충만한 영성유지를 못하고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로 반대했던 것이다. 

4)성경적 결혼관(Biblical Marriage View) 회복과 부흥

하인리히 벌링거(Heinrich Bullinger)의 “기독교 결혼의 의식”(The Christian State of matrimony, 1541)에서 결혼이란 “낙원에서...제정된 것으로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결혼이 차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와 같이 인간의 이상적인 삶에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교도 결혼의 평균적인 연령은 신부는 약 21세, 신랑은 24세였다. 결혼한 자녀들은 성경대로 부모를 떠나 배우자와 연합했고,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일반적으로 7명이었다. 또한 재혼은 흔한 일이었고, 종종 배우자가 사망하자마자 재혼하기도 했다. 

존 윈드롭은 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30세에 세 번째 아내를 얻었다. 대부분 가족은 핵가족이었고, 대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것은 드물었다.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을 이룩하는 것이 성경적 모범이기 때문이다. 

알렌 카튼(Allen Carden)은 “청교도들은 성을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묵인하시는 거의 불신성(不神性)에 가까운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보았다. 남편과 아내는 단순히 아이를 낳으려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서도 성적관계를 가졌다. 실로 청교도들은 이 영역에서 배우자의 요구를 고의적으로 충족시켜 주지 않은 것은 이혼과 교회에서의 출교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결혼관계 내에서의 성행위를 중시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성적 융합이 너무 의미심장하고 신성하므로 그 악용을 삼가함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헌신과 충만한 영성유지 못할 우려로 특정 오락 활동 반대

결혼의 사중적 의미: ①서로 돕기 ②생육 번성 ③성범죄 방지 ➃경건한 후손

 

그러므로 인간의 성에 대한 청교도들의 태도는 특별히 독신을 찬양했고 결혼생활 내에서의 성까지도 거의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던 중세의 카톨릭 전통과 비교할 때 오히려 혁명적이고, 해방적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통적인 교부들(Church Fathers)은 ‘여성에 대해 똑같이 부정적이고 멸시적이었으며 결혼의 성관계에 대해서는 훨씬 더 부정적이고 멸시적이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하였고, 어거스틴(Augustine)은 “출산이 적법하다고 인정했으나 성교에 수반되는 정욕은 언제나 죄악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오리겐(Origen)은 “만일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인류는 성적 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천사적인 방법으로 번식했을 것”이라 했다. 

위와 같은 교부들(Church Fathers)의 부정적 배경은 수세기 동안 조직적으로 결혼과 성적 관계를 타락시켜온 그리스, 로마의 문화에서 온 부정적 영향이다. 이 잘못된 성에 대한 의식을 종교개혁자들이 개혁했고 청교도들이 삶으로 실천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결혼의 주된 목적이 자녀생산에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성공회는 이보다 포괄적인 삼중적인 목적을 제시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결혼이 단순히 자녀생산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사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 서로 돕고(창2:18) 둘째, 생육하여 번성하며(창1:28) 셋째, 성범죄를 방지하고(고전7:1) 마지막으로, 경건한 후손을 두는데 있다(말2:15)고 보았다. 

특히 크렌머(Cranmer)의 공동기도서(1549, 1552)에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멍에를 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동의로 맺어주신 것이다. 그들은 그때로부터 함께 거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도에 따라 모든 일에 동등한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자녀를 낳고 간음을 피하고(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서로 돕고 위로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결혼이란 동성간이 아닌 반드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짝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하와, 곧 여자를 만들어 함께 살게 했고”(창2:18), 예수님 또한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여자)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라”(마19:4, 5)고 결혼을 명하셨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난 동성결혼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요 가증한 범죄(롬1:26-27, 창19:24-25)가 된다. 결혼은 창조의 법령이며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상 최대 선한 선물이다. 

매튜 헨리는 창세기 2장 22절 “여자는 아담의 옆구리의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졌다. 그보다 높아지기 위해 그의 머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요, 그에게 밟히기 위해 그의 발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 그와 동등하고 그의 팔 아래에서 보호받고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사랑받기 위해 그의 옆구리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석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주시듯 아내 사랑을 실행하고, 아내 역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 사랑을 온전히 실천했다(엡5:22-28).

 

kimjoyh@gmail.com

11.1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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