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교회에 가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외부로 노출되고 있는 시대를 맞았다. 과거에는 입소문을 통해 교회 주변에 머물러 있었지만 현재는 SNS를 통해 전 세계로 빠르고 넓게 퍼지고 있다. 뉴스가 오락거리로 전락된 것처럼 진위를 알 수 없는 온갖 이야기들이 교회 안과 밖의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특히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지닌 자들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왜곡 확대시키고 있다. 자극적 표현으로 교회 내의 갈등을 알리며 교회는 절대로 갈 곳이 못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에게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는 마치 지상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교회마다 새 신자들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수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결정적인 위기는 외부의 상황이 아니다. 모든 교회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가 작고 커다란 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극소수가 교회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군중심리가 발동되면 마치 관중석에서 프로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과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 교회 안에 분열과 갈등을 자체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기저에 깔린 문제가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면 갈등의 골이 더더욱 깊어지게 된다. 교회공동체 안에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를 받은 성도들은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소속감을 지우려 한다.
성도의 교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회마다 성도의 교제를 매우 중시한다. 교회 내의 갈등을 종식시키거나 방지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배를 마친 뒤 갖는 친교시간과 주중에 소그룹 모임을 통해 성도들끼리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한다. 이런 노력이 약간의 유익을 줄 수는 있지만 기대와 달리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경우 성도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생겨난 작은 문제가 확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영적 도모를 목적하는 소그룹 모임이 불필요한 말잔치 장소로 전락되기도 한다. 그 결과 간혹 공식예배 이외에 다른 모임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는 교회의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현대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사항 중 성도의 교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교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성도의 교제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성도들이 한 자리에서 모여 식사를 하며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성도의 교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이런 경우 더욱 효과적인 교제시간을 위해 모임의 성격과 구성을 달리하며 노력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오직 말씀과 기도를 중심하는 것, 즉 식탁교제를 거부하고 세상적인 이야기나 험담을 억제하는 것을 진정한 영적 교제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성도들의 노력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현대교회가 이 사실을 놓치고 있기에 교회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성도들이 함께 숙지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참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성도의 교제가 이뤄진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사회단체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이 정해지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이다. 학연, 지연, 이념, 취미 등에 따라 더욱 친근감을 가지고 대하는 대상이 생기게 된다. 때로는 멀리 있는 친척보다 더욱 가족처럼 지내는 대상이 생길 수도 있다. 친한 친구를 따라 출석할 교회를 결정하는 경우도 제법 많다.
이처럼 교회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자와 교회는 출석하지만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가 전혀 없는 자들이다. 물론 약한 믿음으로 인해 미끄러지는 삶을 사는 자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구도하는 자세로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이 있다. 이처럼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의 다양한 신앙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과 아닌 것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설명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매우 신비하며 영적인 관계이다. 참고로 주님께서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교회에 알리신 것은 타인을 판단하는 일에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스스로를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라 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사회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에, 그 결과 성도들 진정한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갈등이 지속되는 경우는 물론,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각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를 마음에 모신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결국에는 진정한 교제가 이뤄질 수 없는 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의 모임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세상의 단체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 전제로 성도의 교제 이뤄진다는 것 확신
펜데믹 시대, 교회의 하나 됨과 성도의 교제 재점검 해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각 교회마다 성도의 교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지극한 관심거리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바 사랑을 실천하되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물건 통용할 정도로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놀라운 모습은 공산주의 이론을 제시한 칼 마르크스(1818-1883)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물론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부러워하거나 절대화 할 필요가 없다. 주님과 사도들이 개인소유를 포기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그들은 주님께서 성도의 교제를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기에 서로에 대해 엄숙한 관계를 맺은 결과,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공동소유를 위해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 역시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나뉘어져 갈등을 경험해야 했고 서신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지속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필요한 인간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지상 교회에서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지만 어떤 노력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서로 간에 분쟁이 없이 사랑과 관심으로 서로 돌보아 그리스도 중심의 멋진 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성도간의 수평적 관계의 기초인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필수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깊은 영적인 교제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성부에게 올린 마지막 기도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소원하는 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사도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 교회공동체의 매우 중요시하였다. 교회들이 각 지역에 흩어져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시작되고 성장하였지만 줄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모든 교회는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단의 출현과 함께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지닌 자들과 아닌 자들을 구분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 그 결과 그들은 ‘거룩한 공회’ 즉 보편적 교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쳤다.
신앙 고백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물려준 신앙의 핵심적 내용을 후대 교회가 정리한 것이다. 그 중에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사도들의 지도를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지녔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하나 됨에 대한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사랑이 넘치는 교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4세기까지 사용됐던 옛 로마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교회’라는 기록이 있고,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결정판부터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를 고백하게 되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Catholic Church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니라 보편적 교회 또는 공교회를 의미한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하나 됨과 성도의 교제를 자신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고백 드린다. 갈등과 분열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성도들의 마음을 닫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이 고백의 무게와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암송하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주셨으며 항상 성령께서 역사하시기에 하나 됨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마음에 두어 거룩한 교회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고, 성령을 의존하여 인간중심의 모습을 버림으로 성도들 사이의 차이점과 이해관계가 교회공동체를 이루는데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할 것임을 다짐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이 공식적으로 제정된 이유는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표준문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회의 하나 됨과 성도의 교제를 부정하는 자들을 삼위일체 또는 그리스도의 인성 또는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의 범주에 넣은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앞에 두고 깊이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한 성도들에게 주어진 교제는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 복음 진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신비한 사귐을 갖듯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성도들과의 깊은 영적 사귐을 갖는 것임을 확신했다.
팬데믹 시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강한 전염성을 지닌 바이러스로 인해 한 장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매우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경험도 하였다. 장시간 예배 후 친교시간과 소그룹모임도 갖지 못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재정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성도들이 모이지 않으니 교회 안에 분쟁이 많이 수그러졌다는 말이 예사처럼 들리지 않는다. 교회의 하나 됨과 성도의 교제를 고백하였고 앞으로도 다른 성도들과 함께 고백할 성도라면 무엇보다 자신이 신앙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뿌리를 두었으며 연합된 그와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겸손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covenantcho@yahoo.com
10.0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