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불감증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예수께서 지상사역을 마치실 시간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행하신 고별설교 후 하나님께 올리신 긴 기도의 일부이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이 세상에 홀로 남겨두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무엇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을까? 예수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제자들의 하나 됨은 4번이나 반복된 기도의 중심주제였으며, 이를 위해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자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하셨다.
현대교회는 분쟁과 분열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한 교회가 세워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이로 인해 교인들이 떠나거나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을 그리 대수로운 일로 여기지 않고 있다. 마치 세포분열을 통해 몸이 자라듯 그런 방식의 분열의 과정을 통해 지상교회가 확장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불감증을 지니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교회역사가 처음부터 불일치와 분열의 길을 걸어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교회를 세우시고 머리되신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우려하신바 지상교회는 결코 ‘하나됨’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최초 예루살렘교회는 물론 그 후에 복음전파로 세워진 교회로 모인 성도들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한 예로 고린도교회는 파당을 짓고 분쟁을 일삼았다. 이런 내적갈등은 성도들의 영적생활에 지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외부 사람들을 향한 복음전파에 결정적인 방해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교회는 역사를 거듭할수록 ‘하나됨’의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왔다. 현재 지상교회는 상당히 많이 분열되어있다. 각자 나름의 성경해석과 전통에 근거하여 교리와 체제를 세우며 독립된 길을 걷고 있다. 자신들의 역사와 경험을 옳은 것이라는 신념이 강할수록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예수께서 올리신 하나됨을 위한 기도가 배타적인 태도를 지닌 일부를 중심으로 탄탄한 공동체를 구축하는 근거로 오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됨에 대해 불감증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하나 됨?
16세기 종교개혁은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위해 교회 내에서 일어난 각성운동이었다. 개혁자들이 결코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목적으로 중세교회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로 불리는 역사적 결과로 인해 개신교에 대한 오해가 생겨났다. 로마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분리되어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한 것은 신교가 구교를 의도적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교가 성경적 교회로의 환원을 꿈꾸며 요구하던 종교개혁자들의 소원을 거부함으로 신교 출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약 5세기가 흘렀다. 구교는 아직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하나의 가톨릭교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의 교회를 중시하여왔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들을 한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톨릭교회 안과 밖으로 인간적인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통적 성경해석에 충실한 신학자들부터 복음과 상관없는 종교성을 추구하는 신학자들까지 신학적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겉으로는 예수께서 그토록 소원하였던 ‘하나됨’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됨은 교황을 중심하는 제도적 연합체이다. 영적 또는 신학적 통일성은 포기한지 오래다. 단지 자율적 정신이 커짐에 따라 강압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대상에 대해서는 큰 관용을 베풀고 있다. 그 결과 로마가톨릭교회가 중시하는 것은 구조 안에서 공존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개신교는 겉으로 하나됨을 강조하는 구교와 달리 외부적 분열을 중단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한 듯하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분열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개신교를 향해 예수께서 원하셨던 ‘하나됨’을 어기고 있다며 조소하고 있다.
교회란?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사도신경의 일부이다. 핵심이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으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이다. 진정한 보편적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할 때만 가능하다. 그를 빼놓은 상태에서는 어떤 형태로 연합도 무효하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셨던 하나됨은 자신과 연합을 통해 이루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가 아닌 교황을 중심하는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적 교회론을 거부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가 행한 고별설교의 핵심이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생명의 관계를 예를 들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르친바 있다. 이 사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한 진리이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그리스도를 제외시킨 신앙공동체를 교회라 부를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제도이다. 결코 인간이 구상한 작품이 아니다.
교회를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성원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지단체나 사교클럽이 아니다.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없이 서로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훈훈한 교제가 이뤄진다고 해도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교회공동체라 불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리도 소원하셨던 교회의 일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들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과 그들 사이의 돈독한 영적관계를 전제한다. 오직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들이 한 떡에 참여하는 한 몸을 이루게 된다. 올바른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참된 교회가 서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문제는 지상교회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는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잠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로마황제로부터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의 상황이 종식된 후 엄격한 도덕적 기준으로 교회를 정의한 도나투스파 분리주의자들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은 소수의 배반하지 않은 자들로 구성된 거룩한 무리만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교부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형성되었다.
어거스틴의 근본사상은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것이었으나, 그가 “하나님의 도성”에서 설명한 것처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여 이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단지 지상교회는 예정되어 구원받은 자들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교회–영적 교회’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보이는 교회–제도적 교회’로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13장) 등에서 가르치신 내용과 일치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됨’이란 교회의 거룩성을 통해 이루려는 신자들의 노력이 아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근거하여 존재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교회분열은 구성원 사이 갈등이 결정적
교회공동체 조직과 결속 다지되 성도의 십자가복음 안에 거함 전제돼야
각자의 길
어거스틴의 초대교회 교회론이 중세교회를 지나면서 변질되었다. 가톨릭교회가 가르친 교회의 보편성은 성경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지녀야 할 권위가 인간으로 구성된 교회 자체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란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복음의 선포가 참 교회의 표지임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이후 새로운 교회역사를 밟게 된 개신교의 지속적인 분열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일까? 각 교파와 교단의 교리와 교회제도가 다른 것을 복음 이해의 다양성이란 포괄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 됨에 대한 불감증은 극히 정상적인이란 것인가?
개혁가들은 출발부터 “바르게 한다!”라는 정신을 중시하였다. 초기에 생겨난 개신교 계파들은 한 마음으로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였지만 이들 사이에 신학적 갈등이 생기면서 서로를 향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초기에는 성만찬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하더니 점점 서로를 향한 비판이 날카로워졌다.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통일된 교회에 대한 비전과 열망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것이다.
개신교가 유럽전역으로 확장되면서 세워진 개신교회는 각 나라의 정치 및 사회적 환경에 의해 더욱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가 생겨났다. 각 교회마다 자신들이 가장 바르게 하고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현재도 바르게 한다는 신념 뒤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흑백논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교회는 서구의 개신교의 역사로부터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수용하였을 때 그들이 속하였던 교파와 교단이 추구하는 교리와 체제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신념도 전달받았다. 한국교회사를 돌이켜보면 초기에는 이런 차이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빈번하게 일어난 신학논쟁의 결과 각 교단이 연속적인 분열을 경험하였다. 그 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령주의운동, 자유주의신학, 그리고 오순절운동이 한국교회에 소개된 뒤 한국 개신교는 더욱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각자만의 분명한 길을 걸어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럽 및 미국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분열역사를 통해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교리 또는 체제의 차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를 말하지만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 결정적인 몫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교단 또는 교회가 서로 갈라질 때 허다한 경우 주도권을 다툼과 같은 정치적인 이유가 하나됨을 깨뜨리는 주요 원인으로 자리잡아왔다. 특히 이해관계로 촉발된 집단경쟁의 구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매우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교회의 갈등과 분열을 촉발한다.
교회의 하나됨은 예수의 소원인 동시에 지상교회를 향한 명령이다. 각 교회공동체마다 조직을 강화하고 결속하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각 성도들이 십자가 복음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성도들 모인 단체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공동체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된다. 나아가서 자기의 고집과 주장을 내려놓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굳이 각자 강조점을 달리하는 다른 교파와 교단을 하나로 묶기 위해 특정한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다양성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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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