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기독교계의 올림픽?
“기독교계의 올림픽이 한국에서 개최될 것입니다!”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총회가 지난 2013년 10월에 부산에서 개최되기 전 보도된 뉴스 내용이다. WCC에 대한 기본 이해가 없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한국교회가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국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동, 하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회 개최 뉴스가 보도된 이후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두고 찬반으로 나뉘어 심한 대립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총회를 유치하는 측에서는 WCC는 세계 110개국의 개신교회, 정교회, 성공회 등 349개 기독교 교단의 5억6천명이 개입한 교회협의체이며, 향후 세계교회의 선교 방향과 전략을 협의하는 모임이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보수성을 지닌 대부분의 교단들은 WCC가 어떤 신학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는지 공개적으로 알리고, 이 총회는 전 세계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올림픽의 성격과 전혀 다르다며 유치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과거에도 WCC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내에서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한국 개신교 중 가장 영향력을 지닌 장로교회가 1959년에 합동 측과 통합 측으로 분열된 가시적 원인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상황 속에서 WCC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재현되자 초기부터 수용과 거부에 관한 강한 의견들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런 대치상황을 종결하기 위하여 진보와 보수 교회지도자들이 2013년 1월 ‘WCC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발표하였다.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합니다. 2. 우리는 공산주의, 인본주의, 동성연애 등 복음에 반하는 모든 사상을 반대합니다... 3. 우리는 개종 전도 금지주의에 반대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행1:8)’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대와 지역과 나라와 종교를 막론하고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천명합니다. 4.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무오하며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임을 천명합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 약측의 심한 반발로 인해 3주 후 공동선언문이 폐기되었다. 진보 측은 선언문이 WCC의 기본사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고 보수 측은 WCC의 기본 입장과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보수성
전국 교회가 들썩거리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전국적으로 WCC의 실체를 알리는 문서배포 및 신문광고가 진행되었으며 수만 명이 운집한 개최반대 집회가 지속되었다. 결국 2013년 WCC 부산총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올림픽’의 모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WCC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대세를 이룬 것이다. 과거에는 교단의 결정을 따르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스스로 WCC의 정체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고 있기에 각 교파와 교단의 교리적 독특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WCC 총회 개최는 한국교회의 보수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부산총회 개최를 앞두고 찬성과 반대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종의 이념대결과 같은 양상을 보인 것이다. WCC가 걸어온 역사적 흔적과 현재 어떤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보다 객관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수성이 강할수록 상대를 이해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기보다 결론적 명제 안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시도한 경우가 많아왔다. 그러므로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상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검증해야 하는데, WCC의 역사검증을 만족할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1948년, 창립총회 전후
WCC가 공식적으로 발족한 것은 1948년도 8월이었다. 44개 국가에 속한 147개 교회와 종교 기관에서 파송한 351명의 대표자들이 네덜란드 암스텔담에 모여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 모임을 주도하던 인물들은 과거 1910년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범세계적 선교단체인 ‘세계선교대회(WMC: World MIssion Council)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다.
1910년부터 1948년까지 일어난 3가지 중요한 에큐메니칼 운동체가 있었는데 향후 WCC의 정체성을 이루는 결정적인 축을 이루게 된다. (1)1921년 미국 뉴욕 근교에서 시작된 ’국제선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2)1925년 스웨덴 스톨홀름에서 첫 모임을 가진 ‘생활과 사역운동(Life and Work)’, (3)1927년 스위스 로잔에서 출발한 ‘신앙과 직제 운동(Faith and Order)’이다. 1948년 창립총회에는 오직 ‘생활과 사역운동(2)’과 ‘신앙과 직제 운동(3)’ 두 축이 만나 이루어졌다. 나머지 축인 ‘국제선교협의회(1)’는 이때 참여하지 않았고 1961년에 개최된 제 3회 총회부터 WCC에 합류하였다.
창립총회에 협력한 ‘생활과 사역운동’은 에큐메니칼 윤리에, ‘신앙과 직제운동’은 에큐메니칼 교회론에 각각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히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신학적 기준과 구체적 방법에 대해 현저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생활과 사역운동’의 주된 관심사는 세속화의 현상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였다. 그들은 교회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사명을 ‘책임사회’로 이해하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무질서, 세계의 평화, 인종문제, 국가 분쟁에 책임을 통감하였다. 그들은 신학적 논의를 피하고 실제적인 문제에 집중하려 하였지만 질문의 핵심은 신학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초기부터 ‘사회복음’의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편 ‘신앙과 직제운동’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교회’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집중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분열을 회개가 요구되는 악한 행위로 정의하고,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각 교회들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WCC의 다른 축인 ‘생활과 사역운동’이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을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특히 그들은 자칫 정치적 문제에 연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였다. 특히 사회봉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개인구원이 간과된 사회구원을 앞세우는 모습으로 인해 불편한 동거를 감당해야 했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운동이 연합하게 됨으로 향후 에큐메니칼 교회론이 매우 넓어지는 방향으로의 길을 열어놓게 되었다. 1961년 제3차 WCC 총회에 동방정교회를 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그 후로 ‘신앙과 직제운동’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창구를 여는 일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자신들의 정체성을 변화시킨 로마가톨릭과 교회의 보편성을 중심으로 대화를 하는 시도하였다. 제 5회 총회에는 로마가톨릭은 물론, 불교, 힌두교, 유대인 대표를 참관인으로 초청하고, 그리스도께서 타종교인들 가운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신앙과 직제운동’은 그리스도의 중심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닌, 세계의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하나 됨을 이루려는 구체적 방법을 추구하려 한 것이다.
2013년 부산 WCC 총회로 이념대결...객관적 이해 기회 놓쳐
외형에 집착한 병적 요소 회개하고 순수 복음 반석위에 서야
1961년, 3차 총회 이후
1961년 인도 뉴델리 제3차 WCC 총회에서 ‘국제선교협의회(1)’가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WCC의 산하기구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이미 1952년 자체 모임에서 교회가 선교를 책임지는 전통적 개념을 포기하고, 세상 즉 지역의 상황을 출발점으로 하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도입하였기에, 1961년 이후 WCC 선교는 복음 선포의 중요성보다 봉사와 대화를 통한 인간성 회복과 인간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는 ‘생활과 사역운동’의 취지와 일치하는 것으로 WCC 내에서 ‘신앙과 직제운동’과의 대립구도가 무너지게 되었다. 향후 WCC는 정치 신학과 해방신학을 수용함으로 더욱 급진적 성향을 띠게 되었고, 1975년 케냐 나이로비 제5차 총회에서는 사회의 구조 악으로부터의 혁명적 해방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점점 WCC는 역사적 기독교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1961년 이후 가장 큰 변화된 것은 제3국 세계교회 출신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1948년 이후 WCC는 서구 교회를 중심하여 발전하였다면, ‘국제선교협의회(1)’는 신생국가의 세계교회 무대 진출을 시도하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제3국이 주를 이루었다. WCC의 주를 이룬 제3국 신생교회는 서구교회를 ‘지배하는 집단’으로 의식하고 있었기에 항상 그들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였고 서로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제3국 교회지도자들이 WCC를 주도하고 있다.
1992년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제7차 WCC 총회에서 이전의 유기체적 교회의 일치를 ‘성령 안에서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로 대치하였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강조하였기에 ‘생활과 사역운동’과 ‘신앙과 직제운동’ 사이의 신학적 차이가 더욱 해소되었고 이로서 모든 인류와 창조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론을 수용할 수 있었다. WCC 교회론이 매우 넓어진 것이다. 특히 이 모임에서 파격적인 샤머니즘적 초혼 행위를 거행한 한인 여성신학자 김현경 교수의 기조연설을 통해 다원주의, 혼합주의, 해방신학, 무속신학, 실존신학의 혼합된 형태로서의 WCC 신학의 민낯이 고스라니 드러났다.
1998년 집바브웨 하라레에서 개최된 제8자 WCC 총회는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에큐메니칼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WCC의 정체성으로 확립시키며 기독교 교단들 사이와 다른 종교들 사이를 가로 막는 장애물을 없애고 연합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굳게 하였다. 또한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제9차 WCC 총회에서는 급변하는 세상의 정세 속에서 코이노니아가 지속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되자 사회, 정치, 경제의 상황을 더욱 잘 이해하여 유연하면서도 정의롭게 대처하기로 결의하였다.
2013년 이후
한국교회는 2013년 제10차 부산 WCC 총회를 통해 그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의 일치, 정의로운 행동으로의 부름, 평화를 향한 에큐메니칼의 소명, 그리고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의 선교와 전도 등의 중요 문서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에 설명된 WCC의 기본사상으로부터 크게 이탈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근거한 복음 전파에 대해서는 무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교회는 현재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앞으로 교회가 져야할 짐이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교회의 외형적인 것에 집착해있던 병적인 요소를 회개하고 순수한 복음의 반석위에 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능력 그 자체이다. 우리의 신학 논쟁과 비판 역시,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복음 안에서 참된 돌파구를 찾으려는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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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