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원연구소 대표)
봄이 오고 있다. 공기가 달라지기도 전에 만물이 이를 먼저 느낀다. 창조주의 섭리인 까닭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보이셨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萬物)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창조주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진 이유다. 이를 본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나 달력을 보지 않고도 본능 혹은 태생적으로 자연의 흐름을 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식물들은 꽁꽁 얼어있는 땅속에서도 소성(蘇醒)을 준비하고 동물들은 내춘(來春)을 맞을 기지개를 켠다. 자연의 섭리다. 섭리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며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가 사람을 창조하신 섭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숨결이나 손길이 닿는 모든 것들이 변질된다는 점이다. 창조의 섭리에 의해 다스린다는 것은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면 좋았던 것이 나빠지고 정상이던 것이 비정상으로 변질(變質)이 되어버린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제는 자연의 습격을 받는 모든 생물체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자연은 사람이 다스릴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훼손시킨 것들이 자연의 순환을 방해하므로 말미암아 정상으로 회복시키려는 섭리와 훼손된 자연이 충돌하여 이상기온이 발생하고 절기마저 바뀌고 있다. 춘하추동에서 춘추가 사라지고 하동만 남게 되면 씨를 뿌리고 그것을 거둘 수 있는 때가 사라지게 된다. 꽃을 피우지 못하고 무슨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섭리는 곧 평화와 맞닿아 있다. 에덴동산에는 평화가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있었으나 그들은 환경에도 위험에서도 자유했다. 옷은 몸을 지키기 위한 용도다.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몸을 해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의미다. 문제는 그 평화롭고 자유한 상태에서 발생했다. 에덴동산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보던 뱀이 그것을 시기했고 그래서 빼앗고자 했다.
유혹에 넘어간 그들이 빼앗긴 것들은 사람의 본질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자 두려워 숨은 것은 평화를 빼앗긴 것이고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고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치부를 가린 것은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는 하나님의 복도 빼앗겼다. 사람은 뱀의 그 한 번의 유혹에 넘어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자유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권세까지 다 빼앗긴 것이다.
사람이 영향을 미치면 모든 것들이 변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까지 다 빼앗기고 말았기에 그 이후부터 사람에게는 진정한 평화도 자유도 사라지고 말았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는 말을 잘 들어보자.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눅 4:5,6의 말씀이다. 천하만국에 대한 영광과 권위가 제게 넘겨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에게서 빼앗았기에 그 권위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마귀에게 빼앗긴 것들을 되돌려주시기 위해 죽으시기 6주 전에 시작이 되어 주일을 뺀 나머지 40일의 기간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며 우리에게 되돌려주시려는 것은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평화와 자유와 권위를 포함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마귀에게서 죽음으로 되찾아 주신 것들을 다 소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이 되찾아 주신 것들을 제대로 받아 누리지도 행사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묻고 싶다. 기독교에 평화와 권위가 있는가? 교회에 자유가 있는가? 성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해야 마땅하나 과연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달력에다 사순절의 시작과 끝을 표기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순절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이 마귀에게서 죽음으로 빼앗아 돌려주신 것들을 온전히 받아 그것을 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평화(平和)가 굽이 없고 바닥이 평평한 신발을 의미하는 평화(平靴)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hanmackim@hanmail.net
03.22.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