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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42)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변화를 위한 변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변화가 필요한 때가 찾아오면 주저하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새로운 것을 수용해야 한다. 물론 전통과 그 유산이 지닌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에 놓여 있다. 이전까지 걸어온 길에 남겨진 흔적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단지 전통의 올무에 갇히게 되면,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중세의 1000년 역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통을 세우는 기간이었다. 길고 긴 세월동안 생겨난 많은 사건들을 통해 ‘중세’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함께 시작된 서유럽의 새로운 역사 속에서 교회는 날이 갈수록 존재감을 드러냈다. 피할 수 없었던 국가와의 갈등에서 교회는 서구사회를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으로 세우셨다는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교회가 모든 것이었다. 일반 중세사는 교회의 역사를 피해갈 수 없다. 등장인물과 사건 대부분이 직, 간접으로 교회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권위와 버금간다고 가르쳤다. 어떤 면으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개신교의 새로운 역사가 출발되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전성기를 고려해 볼 때,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을까? 변화를 위한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살펴본 대로, 영국의 존 위클리프 또는 체코의 얀 후수와 같이 교회 안에서 자성하는 목소리를 손꼽을 수 있다. 개혁에 대한 그들의 의지에 공감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적은 힘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교회의 권력을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이 개혁의 여명기를 장식한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 밖에서 일어났던 결정적인 변화들이 16세기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다. 변화를 위한 변화로서의 동력이 나타난 것이다. 

 

전환의 동력-르네상스

 

중세시대의 특징을 ‘신정정치’라고 정의해도 큰 무리가 없다. 교황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수용한 중세사회의 시민은 ‘신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중세인은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았다. 천국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며, 교회는 이런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했다. 그들은 성경적 신앙심과 상관없이 제도화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다.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변화가 커다란 역사적 전환을 일으켰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마음에 축적된 인간의 본성을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르네상스는 ‘재생’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자연과 과학은 물론 문학, 미술, 건축 등 삶과 밀접한 분야에서 일어난 혁신 운동이다. 8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유사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742-814)는 재위동안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등 많은 인재를 초빙하여 로마제국 문예를 부흥하는데 힘을 쏟았다. 인류사에 최초의 문예부흥을 주도한 것이다. 

그러나 샤를마뉴 르네상스가 종교적이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남김 가장 커다란 업적은 소문자를 개발하였다는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는 수도원과 교회와 함께 도서관을 만들었다. 각 수도원에 전문 필사실을 설립하였다. 성경과 책자들을 직접 써서 책을 만들게 하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카롤링 서체’란 통일된 서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동기는 철저하게 인간중심이었다. 변해가는 세상에 대하여 적절하게 적응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표출된 것이다. 탐욕과 괘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였다. 역사적으로 후에 일어난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초기부터 추구했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이에 따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르네상스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종교개혁의 바탕이 되었던 북부 르네상스는 종교 변화를 성취하려는 강하고 거룩한 요구로 표출 것이다. 

 

전환의 배경-봉건사회의 붕괴

 

나무를 제대로 보려면 숲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숲과 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산맥의 특성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도 커다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생겨났다.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 2가지 중요한 내용을 소개한다. 

그 중 하나는 중세 유럽의 정치제도인 봉건사회의 붕괴이다. 농업 중심의 사회는 성직자, 귀농, 그리고 농노 계급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귀농은 땅을 분배하여 소작농으로부터 얻은 부를 누렸다. 흑수저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운명적 출신 신분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샤를마뉴 제국이 붕괴되면서 중앙 정부의 기능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잦은 전쟁과 흑사병 같은 사회 불안 요소가 고조되면서 사회제도에 변화가 찾아왔다. 민족국가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특히 지중해 해상 무역의 발전으로 플로렌스, 제노바, 베니스 등의 상업중심의 도시가 등장하였다. 

그 결과 이전에 없었던 계급층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른바 부르주아로 불리는 중산층으로서, 화폐경제체제로 변화되면서 상업적 성공과 함께 부를 누리며 새로운 세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과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용병을 고용하여 자신들을 방어하거나, 영역 확장을 위한 전쟁도 불사하였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을 친 것이다.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데 몰입하였다. 변화된 삶에 대한 욕구가 창의성을 추구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은행업무가 발전하였다. 14세기 유럽 은행 분야를 주도한 것은 베니스였다. 

이런 변화에 대하여 교회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은행이자를 고리대금이라 간주하고 반대하는 등 목소리를 냈지만 전체적인 사회의 흐름과 함께 찾아온 변화를 근본적으로 중단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사회 전반에 흐르던 정신, 즉 인간의 욕구를 표출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을 영향력이 쉽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의도적으로 교회와 부딪히는 것을 피하려 했다. 북부 르네상스는 교회에 대하여 매우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었다. 향후 종교개혁이 단행될만한 토양이 조성된 것이다.  

 

전환의 배경-고대문헌을 접함

 

전환의 다른 배경은 고대문헌을 통해 고대지식을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중산층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특히 봉건주의가 붕괴된 후 중산층이 사회적 엘리트로 등장하면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그 방법은 고대 문헌의 발견과 함께 그들의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대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은 고대 라틴어와 고대 헬라어로 기록된 문서 번역과 연구에 매진하였다. 인간의 가치와 창의성을 우선 두었다고 믿었던 고대사상을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신들의 상황에 적용하기 원했던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 대부분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에 능통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상관관계를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어떻게 그들이 고대문헌을 접할 수 있었을까? 십자군 운동을 포함한 유럽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명성을 안고 각자의 길을 걷던 동로마와 서로마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동로마는 지속적으로 로마문화를 보존하였지만 476년 야만스런 게르만족에 의해 몰락한 서로마는 이전보다 훨씬 못한 수준의 문화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과 함께 서방 유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동방 비잔틴 문화의 요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동로마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서방사회는 고대문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새롭게 발견된 고대사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 대중화를 이루되었다.  

그뿐 아니다. 1453년 이슬람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정복당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후예로 자칭하던 동로마제국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때 동로마 사람들이 서방으로 건너왔다. 그들 중에는 서유럽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과거 로마의 문화에 익숙한 자들이 있었다. 

봉건제도의 붕괴와 함께 도래한 시대에 적합한 변화를 추구하던 르네상스 인들은 개인의 사상적 성장을 부추기는 새로운 정신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 중심’으로부터 ‘인간 중심’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시작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인간 중심’의 세계를 확고하게 만든 르네상스의 정신은 17세기 계몽주의와 그 후 낭만주의를 통과하며, ‘신을 배척하는 인간’을 매우 정상적인 태도로 수용하도록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인간 중심’ 사상의 시작이라 해도 큰 무리가 아니다.      

covenantcho@yahoo.com

08.1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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