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모든 문장에는 부호가 있다. 여러 부호를 통해 문장의 뜻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강조하고자 하는 것, 인용(引用)하고 있는 것 등을 알 수가 있다. 작가(作家)가 마침표를 찍기까지 아무리 길어도 문장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생(生)의 마침표가 있기까지 이런저런 부호로 삶은 이어져간다. 누가 그 마침표를 찍는가? 인생의 작가이다. 류시화 시인의 책 가운데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아주 적절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신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 너무 안타깝지만! 인생의 유일한 작가는 지혜도 사랑도 능력도 무한하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이시다. 시건방지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종결자인 양 삶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으려고 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 물론 로뎀나무 아래에서의 그의 형편은 지치고 어려운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이전 삶에는 이미 그릿시내, 사르밧, 갈멜산 등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는 높고 깊은 위기의 장소와 시간들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로뎀나무는 작은 등성이일 뿐인데 엘리야는 거기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탄식하며 넋두리를 한 것이다. 그를 향한 작가의 결말은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끝이 거기가 아니라며 그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시고 멋지게 더 사용하시다가 죽음도 없이 하늘로 이끄신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늘에 올라가서 로뎀나무에서 자신의 한 말을 기억하며 꽤나 무안했을 것이다.
최근에 더 듣고 더 부르는 복음찬송이 있다. 김성조씨가 만들었는데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허락된 고난”이 제목이며 그 가사는 이렇게 전개된다. “나에게 고난은 아픔이요 눈물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나에게 환난은 아픔이요 눈물입니다/ 하지만 그 환난을 통해 당신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시련의 바다를 지나며 주님의 심정을 품게 하소서/ 내게 있는 모든 고난은 허락된 하나님의 뜻/ 거친 광야를 지날 때 더욱 낮아지게 하소서/ 환난의 바람 불 때에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나 비록 벼랑 끝에 있다 해도 희망의 끈 놓지 않게 하소서/ 내게 있는 모든 고난과 시련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그렇다. 우리의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허락된 모든 고난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선한 계획을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나 비록 벼랑 끝에 있다 해도 희망의 끈 놓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로 바뀐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인간의 벼랑 끝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희망의 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떨어져 추락하라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벼랑에서 멋지게 날아오르면서 더 변화된 모습으로, 더 풍요로운 관점으로, 더 풍성한 삶을 살라고 잠시 벼랑끝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12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존 번연이, 교수형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훗날 기억하며 했던 말이다. “나는 이따금 밧줄을 목에 두른 채 사다리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감옥생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감옥의 벼랑 끝에서 결코 낙심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놀라운 희망의 끈을 붙잡고 훨훨 날아올랐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큰 축복을 안겨다 준 불멸의 작품 “천로역정”이 거기서 탄생한 것이다. 어떤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자문(自問)해 보자. 이 고난은 불행하게 닥친 우연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다! 이 고난은 나의 벼랑 끝인가? 아니다. 새로운 일이 펼쳐질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끈이다!
06.15.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