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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景觀)과 풍경(風景)

김성국 목사 (퀸즈장로교회 담임)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경관(景觀/view)과 풍경(風景/landscape)은 서로 교환해 쓰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전자(前者)는 어떤 객관적인 모습을 지칭하고, 후자(後者)는 어떤 경관의 배경까지 살피면서 주관적, 예술적 감각으로 바라볼 때 사용한다. 풍경화(風景畵)는 있어도 경관화(景觀畵)라는 단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두 단어에 대해 무감각했는데 얼마 전 맨해튼의 “더 모건 라이브러리 & 뮤지엄”을 방문했다가 두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한 글을 보고 묵상하게 되었다. 그 장소에는 많은 작품들이 수집, 전시되고 있었는데 멋진 경관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었고 좋은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멋진 경관을 찾는다. 평수는 같아도 경관이 멋진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의 가격은 현격(懸隔)한 차이가 있다. 풍경이 좋다는 것은 사뭇 다른 의미가 있다. 풍경은 주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요, 더 넓은 배경까지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웅장함이 있다.

 

이런 글을 읽었다. 제자 두 명이 스승을 찾아 왔다. 오랫동안 함께 공부를 한 두 제자는 이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스승의 곁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스승은 두 제자 앞에 하얀 종이를 꺼내어 그 가운데 점을 하나 찍고서 제자들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한 명은 점이 보인다고 대답했고, 또 다른 한 명은 흰 종이가 보인다고 대답했다. 스승은 흰 종이가 보인다고 대답한 제자에게는 떠나도록 허락했지만 점이 보인다고 대답한 제자에게는 공부를 더 할 것을 명령하며 이 말을 덧붙였다. “공부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갖게 하는 훈련인거야.” 경관을 넘어 풍경을 보는 훈련에 대한 글이라고 이해했다.

 

며칠 전 안과(眼科)를 다녀왔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눈의 문제가 쉽지 않은 문제임을 다시 느낀 시간이었다. 안과에서 눈의 문제를 아무리 잘 해결한다 하여도 사람의 시각이 불안전한 것임은 모두가 알고 있다. 보기는 보아도 무엇을 보았는지 가물가물하다. 보기는 보아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잘 모른다. 물리적인 시각에서도 문제가 한둘이 아닌데 영적인 영역에서는 더할 나위 없다. 예수님께서도 눈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 6:22-23) 영적인 눈이 매우 중요한데 많은 사람들이 선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엉뚱하게 악하다고 말한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5) 육신의 눈에 문제가 있으면 안과를 가면 되는데 영적인 시각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영적인 눈의 치유는 마음에 달려있다. 영의 눈도 좁은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경관만 보는 눈이 있고, 넓은 마음으로 넓게 풍경까지 보는 눈이 있다. 

 

필자는 안경이 세 개이다. 일반 안경, 돋보기 그리고 선글라스이다. 밖에서 끼던 선글라스를 그대로 끼고 점잖은 실내에 들어간 적도 있다. 내 눈에 안경이 문제건만 왜 이리 실내가 어둡지 하면서 한 동안 어리둥절한 적도 있었다. 영적 경관만이 아닌 영적 풍경까지 볼 수 있는 안경이 내게 절실히 필요하다. “청결한 마음”의 안경이.

04.2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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