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예수장로회 총회장, 뉴욕센트럴교회 담임
필자의 출생지는 전남 순천이었고 아버지의 고향은 여천 화치라는 곳이었다. 어려서 아버지 따라 화치의 큰 집을 찾아가는 길목은 언제나 나환자 마을인 애양원을 지나가야 했었다. 그 동네를 지날 때엔 숨을 참고 빨리 달려야 나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에 어린 나는 힘차게 달리다가 숨이 찰 때에도 애양원을 등지고 숨을 쉬곤 했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복음을 접하지 못한 때라 애양원, 손양원 목사나 두 아들들의 순교사화도 일반적인 사건의 하나로 여겼지만 그 깊은 내용은 알지도 못하던 때였다. 어릴 때 단순히 나병환자들이 끔찍하게 무섭다는 선입견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는 애양원의 풍경만큼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고 평생의 선망의 동산으로 각인된 곳이었다.
그 시대 내 눈에 비친 주변의 풍경들은 온통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한 환경뿐이었다. 전쟁이 지나간 폐허 속에서 어지러움만이 가득했던 때였다. 도로와 공터엔 폭탄으로 움푹 페인 웅덩이들과 도처 도처에 불타고 뼈대만 난삽하게 흩어져 있던 군용 차량들의 상흔들뿐이었다. 그런데 애양원은 파란 빛깔 광양만 바닷가에 초록색 숲으로 뒤덮인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육중한 석조 건물의 서양식 예배당과 하늘 향한 뾰족한 종탑 위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들은 어린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미래의 선망의 유토피아의 풍경 그 자체였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거의 시골 큰 집을 가보지 못한 채로 30년의 시간들이 지나갔었다. 목사가 되어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삶의 현장이 그 애양원이었음을 알았을 때부터는 누구보다 먼저 일찍 그 현장을 지나다녔다는 기득권(?)을 간직하면서 살아왔다.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이민 목회 34년의 시간이 흘러간 후 드디어 며칠 전에 꿈에 그리던 애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실로 어린 시절 애양원 앞을 지나던 그 때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어제서야 애양원을 찾았던 것이다.
순천에서 자동차로 애양원을 찾아 나서는 순간부터 내 머릿속의 추억들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신작로 길에 멀지 않았던 거리였는데 예전에 없었던 거대한 여수 비행장의 블록 울타리를 한 참을 돌아서 숨어있는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명찰을 붙인 정중하게 생긴 초로의 안내원이 친절하게 맞이해줬다. 그는 다가와서 자신이 손양원 목사의 막내아들인 손동길 목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아주 익숙한 능변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태어났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애양원에 부임했고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 1940년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에 맞서다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좌익 학생에게 두 아들을 잃었으나 그 학생을 양아들로 입양해 돌봤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북한군에게 잡혀 여수에서 총살당했다. 양아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설명했고, 암으로 48세에 세상을 뜨기 직전에 본인이 사도신경을 같이 암송하는 것으로 그의 생애를 마무리했다고 설명했다.
손 목사의 큰 딸 손 권사가 간증과 책을 쓸 때에 너무나 미화시킨 부분들이 많았는데 사실을 사실로 전하지 못하고 확대 미화시킨 것은 주님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몇 가지 내용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내가 잘 못 알았던 것 중의 하나는 양아들을 미국 유학을 시켜서 목사가 되어서 평생을 참회의 삶을 살았다는 대목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양아들은 미국에 가본 적도 없고, 신학교나 목사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또 하나 과장된 전달은 손양원 목사께서 나환자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다는 대목도 사실과는 다르다고 했다. 물론 아버지의 신앙이나 인격으로 볼 때 필요하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었지만 직접 그렇게 했었다는 증언은 전혀 없었다고…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되게 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와전된 소문들이 아버지를 욕되게 할까 봐 유일한 생존자인 아들이 나서서 바로 잡는 중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토록 동경했던 애양원의 진실과 감동을 현장에서 또한 손 목사의 아들을 통해서 직접 들으면서 설교자들이 얼마나 진실과 다른 이야기들을 강단에 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성찰해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도 예! 예! 아니오! 아니오! 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너무 지나친 감동을 부추기려는 유혹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와전하는 것도 진실을 벗어나는 죄임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애양원은 내가 어릴 때 품었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고, 이번 방문에서는 그 풍경 속에 볼 수 없었던 더욱 감동스러운 사랑의 원자탄의 강력한 사랑의 분진들이 내 영혼 깊숙이 젖어들었던 실로 오랜 아름다운 감동을 안고 어릴 때 걸었던 바닷가의 뚝을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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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