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서용호는 1868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그는 가야동에서 거주하였는데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이 아닌가 싶다. 그는 37세가 되던 1904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을 꿈꿨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그는 홀로 그해 ‘만추리아’ 증기선에 올랐다. 그해 11월 2일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증기선을 탈 때 그는 영어로 그의 이름을 Soh Yong Ho로 표기하였으나, 하와이에 도착한 후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그의 이름이 Sur Yong Ho 또는 Shur Yong H라고 표기되었다. 그의 이름이 초기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교인명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아 하와이로 이주한 후 기독교인이 된 것 같다.
제2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07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얼 크랜스턴 감독의 사회로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서용호는 가와이섬에 있는 길나위아 지역과 가파 지역의 순회 전도인으로 파송을 받았다. 위의 두 지역에 각각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그가 파송을 받은 그달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위의 두 지역 한인감리교회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학습 교인이 8명, 세례 교인이 15명,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8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70명이었고, 주일 평균 출석한 주일학교 학생수가 60명이었다. 그해 헌금한 액수는 7달러였고, 그중 교회를 위한 선교 헌금으로 1달러를 지원하였고, 교회 확장부에 1달러를 후원하였으며, 부인내지선교회에 1달러를 지원하였고, 기타 헌금이 4달러였다. 건축 수리비로 43달러를 지급하였다.
1908년 1월에 보고된 교세와 비교하면 서용호가 1년간 섬긴 결과는 아래와 같이 교인수로 성장했으나 주일학교와 헌금은 저조했다. 학습 교인이 43명이 많은 51명, 세례 교인이 6명 적은 9명이었고, 지난 한 해에 14명의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고, 성인 3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3명이 적은 5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49명이 적은 21명이었고, 주일 평균 출석한 주일학교 학생수가 42명이 적은 18명이었다. 그해 헌금한 액수는 5달러가 적은 2달러였고, 그중 신설된 내지선교/교회학장 헌금으로 2달러를 후원하였고, 교육부에 2달러를 지원하였으며, 부인내지선교회에 지원하지 않았고, 교회를 위한 선교 헌금 항목과 교회 확장부 항목은 없었다. 건축 수리비는 없었다.
1908년 1월 14일에 제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서용호를 하나마울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와 함께 이원S도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마울루 지역뿐만 아니라 리휘 지역을 합쳐서 ‘리휘 순회 지방’으로 삼고 이들 두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할 순회 전도목사를 두기로 하였지만, 하와이 선교연회 기간에는 지정하지 못했다. 그만큼 한인 노동자가 흩어져서 노동하는 지역에 비해 한인 교회 지도자가 부족했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순회 지방 이름을 리휘로 하였으므로 하나마울루 한인감리교회보다 리휘 한인감리교회가 더 큰 교회 같다.
서용호가 파송된 그해 하나마울루 한인감리교회의 통계가 따로 없었고, 리휘 한인감리교회가 합쳐진 ‘리휘 순회 구역“통계는 아래와 같았다. 학습 교인이 35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6명이었으며, 주일학교가 한 곳에만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은 7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3명이었고, 매 주일에 주일학교 학생이 평균 20명이 출석했다. 예배당은 한 곳에만 있었고, 75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었다. 그해 10달러를 헌금하였는데 지출 내역으로는 내지선교/교회확장부에 5달러를 후원하였고, 교회 교육비로 2달러를 지급하였으며, 부인 내지선교회에 1달러를 기부하였고, 제너럴 연회비로 2달러를 지원하였다. 이상의 통계에서 볼 때 주일학교와 예배당은 리휘 한인감리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년간 섬긴 서용호의 사역을 이듬해에 열린 하와이 선교연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두 교회가 합쳐진 통계로만 비교할 수 있다. 학습 교인은 작년과 같이 35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9명이 늘어나 25명이었다. 그리고 지난 1년간 15명이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가 한 곳에 더 개교하여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은 작년과 같은 7명이었으나,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50명이 많은 73명이었고, 매 주일에 40명이 많은 60명의 주일학교 학생이 출석했다. 예배당은 작년과 같이 한 곳에만 있었고, 75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었는데 작년에 없었던 예배당 개조비로 400달러를 지급하였다. 그해 작년보다 4달러가 많은 14달러를 헌금하였는데 지출 내역으로는 내지선교/교회확장부에 작년보다 2달러 적은 3달러를 후원하였고, 교회 교육비는 지급하지 않았으며, 부인 내지선교회에 1달러 많은 2달러를 기부하였고, 작년에 제너럴 연회비로 2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아예 항목이 없었다. 작년에 지원하지 않았지만, 외국선교 교회헌금과 외국선교 교회학교헌금으로 각각 1달러를 헌금하였고, 내지선교/교회 확장부의 주일학교 헌금으로 2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주일학교부 교회헌금과 주일학교부 교회학교 헌금을 각각 2달러씩 헌금하였고, 미국성서공회에 1달러를 헌금하였다. 이상의 통계에서 볼 때 지난 1년간 교회가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4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09년 3월 3일부터 4일간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해 오아후섬에는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외에도 에와 한인감리교회, 모코리아 한인감리교회,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 그리고 와이파후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감독 찰스 W. 스미스 박사는 서용호를 오아후섬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그 외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민찬호를 목사로 파송하였고, 홍기H, 임춘H, 안원규 이상 3명도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서용호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 권사로 파송될 때의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학습 교인이 26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63명이었으며, 주일학교가 두 곳에 개설되었고, 교사와 직원이 13명이었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120명이었으며, 매주 주일학교에 출석한 평균 학생수는 100명이었다. 지출 총액은 18달러였는데 이중 해외선교 교회헌금이 2달러였고, 내지선교/교회확장 교회헌금이 4달러였으며, 내지선교/교회확장 교회학교 헌금이 2달러였고, 교회 일반 교육헌금이 1달러였으며, 어린이 교육기금이 1달러였고, 교회학교 교회 헌금이 1달러였으며, 미국성서공회에 3달러를 기부하였고, 부인해외선교부에 2달러를 후원하였으며, 부인내지선교회에 2달러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예배당이 2동 있었고, 두 예배당의 싯가는 6,100달러였으며, 1,000달러 싯가의 사택이 한 동 있었고, 그해 예배당과 사택을 수리하는 데 1,000달러를 지급하였다.
이듬해 1910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통계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이 교회가 상당히 성장했다. 학습 교인이 작년보다 16명이 많은 42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13명이 많은 76명이었으며, 주일학교가 한 곳이 더 많은 세 곳에 개설되었고, 교사와 직원이 3명이 많은 16명이었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30명이 많은 150명이었으며, 매주 주일학교에 출석한 평균 학생수는 28명이 많은 128명이었다. 작년에 없었던 엡워스 청년부를 두 곳에 신설하였고, 엡워스 청년부에 등록한 학생이 69명이었다. 지출 총액은 작년보다 50달러가 많은 68달러였는데, 이중 해외선교 교회헌금이 1달러 적은 1달러였고, 작년에 지급한 내지선교/교회확장 교회헌금 항목과 내지선교/교회 확장 교회학교 헌금 항목은 없어졌고, 교회 일반 교육헌금이 작년과 같이 1달러였으며, 어린이 교육기금 항목은 없어졌고, 교회학교 교회 헌금이 2달러 많은 3달러였으며, 미국성서공회에 2달러 적은 1달러를 기부하였고, 부인해외선교부에 후원하지 않았으며, 부인내지선교회에 작년과 같이 2달러를 후원하였으며, 작년에 하지 않았던 흑인보조회에 1달러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작년과 같이 예배당이 2동 있었고, 두 예배당을 합쳐서 시가가 작년보다 200달러가 많은 6,300달러였으며, 1,000달러 싯가의 사택이 한 동 있었고, 그해 예배당과 사택을 수리하는 데 작년보다 700달러가 적은 300달러를 지급하였다.
1910년 3월 16일부터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5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서용호는 오아후섬 아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유순을 아리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와이파후와 와히아와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하는 ‘와히파후 순회 목사’로 파송하였다. 그러므로 순회 목사가 주일에 아리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을 때 서용호 목사가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주일예배를 인도해야 했고, 특별한 경우 심방도 불가피했다.
서용호가 아이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었을 때 본 교회 교세는 따로 없었고, 아래와 같은 ‘와이파후 순회 구역’ 통계만 있었다. 학습 교인이 36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21명이었으며, 두 곳에 주일학교가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은 5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54명이었고, 평균 38명이 매 주일 주일학교에 출석하였으며, 엡워스 청년회가 한 곳에 있었고,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은 15명이었다. 예배당이 한 동 있었고, 그 싯가는 600달러였다. 엡워스 청년회와 예배당은 와이파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지출한 헌금은 16달러였고, 이 중에 해외선교부 교회 헌금이 1달러였으며, 해외선교부 주일학교 헌금이 12달러였고, 교회 일반 교육 헌금이 1달러였으며, 주일학교 교회헌금이 2달러였다.
1911년 교세 통계와 비교하면 지난 1년간의 실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이 한인감리교회 교세가 따로 없어서 다음과 같이 ‘와이파후 순회 구역’ 통계와 비교할 때 성장했던 것같다. 학습 교인이 11명이 적은 25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9명이 많은 30명이었으며, 지난 1년간 4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12명이 세례를 받았다. 한 곳이 많은 세 곳에 주일학교가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은 1명이 많은 6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명이 많은 56명이었고, 평균 38명이 매 주일 주일학교에 출석하였으며, 엡워스 청년회가 한 곳이 많은 두 곳에 있었고,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은 13명이 많은 28명이었다. 예배당이 작년과 같이 한 동 있었고, 그 시가도 작년과 같은 600달러였으며, 작년에는 없었지만, 예배당 수리비로 24달러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지출한 헌금은 12달러가 많은 28달러였고, 이 중에 교회 일반 교육 헌금이 작년과 같이 1달러였으며, 주일학교 교회헌금이 1달러 적은 1달러였고, 작년에 보조한 해외선교부 교회 헌금 항목과 해외선교부 주일학교 헌금 항목은 없었고, 작년에 하지 않았던 항목으로 내지선교/교회확장 헌금으로 25달러를 지원했고, 미국 성서공회에 1달러를 후원하였다.
1911년 1월 17일부터 이틀간 에드윈 홀트 휴즈 감독의 사회로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6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는 서용호를 파송하지 않았다.
제7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2년 3월 23일부터 그달 25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J.W. 배쉬포드 감독은 서용호를 가와이섬 엘리엘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연회가 이선일 목사의 지도하에 엘리엘리 한인감리교회 임시 목사를 파송하기로만 하고 임시목사를 지정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분간 서용호가 예배뿐만 아니라 목회 전반을 담당해야 했다.
그런데 1913년에 개최한 제7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지 못하여 서용호의 사역을 가름할 수 없고, 1913년 하와이 선교연회록뿐만 아니라 1914년 하와이 선교연회록도 찾지 못하여 그의 파송 여부를 찾지 못했다. 그 후 그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연회록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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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