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129. 한재명 (1869-1945)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한재명(韓在明)은 1869년에 한성부(서울)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1904년에 조동에 거주하였는데 그는 상처한 홀아비였다. 하와이 노동 이민을 꿈꾸던 그는 인천을 거쳐 일본에서 몽골리아 선박을 타고 35세가 되던 그해 12월 9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Han Chai Myeng으로 표기했다.

 

한재명은 노동 기간을 마친 후 호놀룰루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11월 30일에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에 합의했을 때 한재명은 한인 합성협회 대표로 참여했다. 이듬해 2월에 그가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국민회를 창립하였고, 국민회 산하에 공립협회는 북미지방 총회로,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 지방총회로 개편되었다. 그해 그는 하와이 지방총회 총무 겸 구제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인망이 있었다. 

1912년 2월에 하와이 지방 총회 헌장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한재명은 박상하, 고석주, 주인준, 박기홍과 함께 하와이 지방 총회 헌장 기초위원으로 활동했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회장 최정익이 그해 10월 19일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 의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소집하여 중앙총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할 때 하와이 지방 총회는 중앙총회장 후보자로 윤병규와 부회장 후보자로 한재명을 추천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재명은 정칠레와 함께 중앙총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한재명은 1914년 5월에 하와이 한인청년회가 조직되어 행정부 회장에 이승만이 선정되었을 때 한재명은 박용만 등 9명 이사부 임원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리고 그는 국민보 편집인으로도 활동했다. 그해 이후 한재명은 독립운동에 자금을 후원하여 1937년까지 매년 지원했다. 

제10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5년 2월 24일에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감독 에드윈 H. 휴즈 박사의 사회로 개최되어 그달 28일까지 나흘 동안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윌리엄 H. 프라이 박사였고, 한국 총무는 임준호 목사였다. 그 외 한국인 임원으로는 일본인 C. 나카무라 목사와 함께 김이제 목사가 재무부 부총무로 활동하였고, 홍치범 목사가 한국어 통역관이었다. 그해 10명의 정회원 중 한인 목사는 2명이었는데 9년 차의 홍치범 목사와 8년 차의 김이제 목사였고, 5명의 준회원 중 한인 목사는 4명이었는데 과정을 마친 홍한식 목사와 4년 차의 임준호 목사, 조연택 목사 그리고 이선일 목사였다. 그리고 수련자 6명 중 한인 수련자는 4명이었는데 3년 차의 이관묵, 박세환, 김재성 그리고 2년 차의 차윤중이 있었다.

한재명은 조석진과 안원규와 함께 1915년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오아후섬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고, 임종순이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본 교회 시무 목사는 파송하지 않았다. 하와이 선교연회가 염두에 두었던 홍치범 목사가 그해 2월 하와이 선교연회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한식 목사를 임시 목사로 파송한 것으로 보인다. 

그달에 홍치범 목사가 보고한 교세 통계에서 한재명이 권사로 파송되던 1915년 2월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82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34명이었으며, 세례 교인 중 25명이 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지난 한 해 동안 5명이 세례를 받았고, 12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4명이 이명하여 학습 교인이 되었고, 입교한 자는 없었다. 주일 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직원과 교사가 13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00명에 2명이 모자라는 198명이었으며, 엡워스 고등부에 37명이 등록하였다. 예배당이 두 곳에 있었고, 두 예배당과 본 교회 소유의 한인 학교가 당시 시가로 25,000달러였으며, 건물 부채가 5,000달러였고, 건물 수리비로 500달러를 지출했다. 

1916년 1월 23일 주일 오후 3시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가 호텔 길과 베레타니아 길 사이에 있는 펀취볼 길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헌당식을 가졌다. 프라이 감리사의 인도로 진행된 헌당식에는 제일감리교회 L.L. 루프보로 목사와 이승만 박사와 홍한식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하와이 선교연회 재무 리처드 트렌트와 제일감리교회 회계부장 존 맥타갈트가 연설하였다. 함께 연설한 C.B. 리프리가 설계하였고, 산코 건축회사가 7,000달러 공사비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16년 2월에 보고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통계에서 지난 해와 교세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3명이 많은 85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4명이 많은 138명이었으며, 세례 교인 중 타 지역으로 이주한 자는 3명이 적은 22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1명이 많은 6명이 세례를 받았고, 4명이 많은 16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작년과는 달리 이명 학습 교인은 없었고, 작년과 같이 입교한 자도 없었다. 주일 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직원과 교사가 작년과 같은 13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3명이 적은 175명이었으며, 엡워스 고등부에 1명이 많은 38명이 등록하였다. 예배당이 두 곳에 있었고, 두 예배당과 본 교회 소유의 한인 학교가 당시 시가로 7,000달러가 많은 32,000달러였으며, 건물 부채가 245달러가 적은 4,755달러였고, 건물 수리비로 6,422달러가 많은 6,922달러를 지출했다. 

하와이 선교연회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송헌주 목사를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시무 목사로 파송하기까지 9개월이나 호놀룰루 한인 감리교회에 시무 목사가 없었다. 그에 더하여 국민회관 건축과 한인중앙학원으로 하와이 한인 사회에 평안치 않은 문제들이 일어나 한인감리교회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나 위의 통계로 보면 교세는 1년 전과 비슷했던 것 같다.

1916년 2월 17일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1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는 한재명을 파송하지 않았다. 그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제일한인감리교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듬해 1917년 3월 8일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도 그를 파송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6년과 1917년에도 그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3월 14일에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애드나 라이트 레오나르드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어 그달 17일까지 있었다. 본 연회가 1916년 이래 파송한 송헌주 목사가 1917년에 교회를 떠나자 그해 방화중 목사를 임시 목사로 파송하였다가 1918년 3월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시무 목사로 파송하였다. 안완규, 남세연, 백낙M 이상 3명을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면서 한재명을 위시하여 이태성과 연계송 이상 3명을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해 3월에 보고된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34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60여 명이었으며, 지난 1년 동안 14명이 세례를 받았고, 17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25명이 입교하였고, 20명이 학습을 받았다. 교회 학교는 한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11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103명이었다. 엡워스 청년회에 35명이 등록하였다. 11,000달러 시가의 예배당과 5,000달러 시가의 사택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두 건물에 350달러를 지출했다. 그리고 훈련비로 50달러와 기타 용도로 380달러를 지급했다. 

그런데 1918년 7월에 한인 사회의 분열과 분쟁으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분열되었다. 그달 29일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신립교회가 세워졌는데 그해 12월 23일에 한인기독교회로 명명하였다. 이전에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 목사로 활동하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남가주 대학을 졸업한 민찬호 목사가 한인기독교회 시무 목사로 추대되었다. 

분열의 소용돌이에 가운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약화하여 1919년 3월에 재적수가 130명이었고, 주일학교 교사가 3명이었으며 60명이 등록하였는데 1920년에는 그나마 절반가량 줄어 70명이 재적했으나, 주일학교 교사는 성장하여 교사와 직원이 7명이었고, 75명이 등록하였다. 

한재명은 1919년 이후 교역자로 파송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1915년부터 1916년까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2년간이었다. 

그 후 한재명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한인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재명은 1919년 10월에 호놀룰루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이 합자한 중안장유회사를 세울 때 12명 임시 이사원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그는 1920년 3월에 곽림대에 이어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원이 되었고, 다음 달 4월에 중앙총회 재무 대리를 겸하였으며, 그해 12월에 북미 총회 총무로 활약하였으며, 이듬해 총무와 북미총회 사무원으로 활동하였고, 신한민보사 사무원으로도 활동했다. 

3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하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도미하였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때 북미총회장 최진하가 1921년 2월 16일 오후 6시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마펫 선교사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회장의 개회로 일동이 애국가를 부른 후 황사선 목사가 기도하였고, 회장이 취지 설명을 한 후 정인과 목사가 환영사를 하였으며, 국어학교 학생들이 창가를 부른 후 은잔 한 개를 기념품으로 수여하였다. 마펫 선교사가 한국 안에 어려운 일이 없지 아니하고 (독립 등) 한인들이 원하는 것이 많지만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나가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연설이 있고 나서 총무였던 한재명이 답사를 하였다. 

한재명은 1923년에 북미지방 총회 학무에 재직했고, 1924년과 1925년에 걸쳐 북미지방 총회 부회장 겸 대의원회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6년에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실업원으로 활동하였고, 1927년에 새크라멘토 지방회 서기를 맡았다. 1931년에 한재명은 로스앤젤레스 공동회 국어학교 교육 위원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미주 한인연합회 로스앤젤레스 한인 공동회 대표 겸 연합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35년에 로스앤젤레스 삼일학교 교육부 원장과 교미 30년 기념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36년에 북가주 대표로 재미 한인 사회 발전책 실행위원 21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대한인 국민회 로스앤젤레스 대표와 6인 중앙집행위원 후보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939년에 국민회 시사 위원으로 선정되어 중일전쟁의 정세와 재미 한인의 대의 선전 방침 등을 연구하였다.

한재명은 1945년 9월 12일에 향년 76세에 미국 남가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에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한재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03.01.2025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