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윤계상(尹繼常)은 1867년에 한국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파평 윤씨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윤원식이었고, 그의 자가 윤계상이었다. 결혼한 그는 처자와 함께 평학리에서 거주했다. 그가 살던 평학리가 경남 합천군 대명면에 있는 평학리일 수도 있다.
윤계상은 1905년에 38세의 나이에 처자를 한국에 두고 홀로 시베리아 선박을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시베리아호를 탈 때 그의 이름은 윤원식이었고, 영문 표기로는 Youn Won Sik이었다. 그는 그해 5월 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에서 윤계상은 한자 표기 尹繼常 대신에 尹桂相으로 썼고, 일본 영사관은 尹戒相으로도 표기했다. 그리고 영문으로는 Yoon Kie Sang으로 표기했다.
윤계상이나 윤원식은 초기 호놀룰라 한인감리교회 교인명부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한국에서 교인이 아니었을 것 같다.
윤계상은 1909년을 전후하여 하와이 마우이섬 하나에 거주했다. 그해 7월 21일에 발행된 신한민보에 게재한 신한민보 후원 명단에서 윤계상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신한민보에 게재한 후원 명단이다: 박용택, 조갑석, 윤계상, 김덕회, 김창덕, 고운선, 박재순, 김용구, 이근선, 김창현, 강명옥, 신덕문, 박원백, 박창순, 변익보, 김봉길, 조문칠, 한영호, 길찬록, 이성환, 김재규, 김영진, 조순옥, 임재덕, 이장준, 류인서, 고성화, 박상선, 문인화, 김주애, 박석근, 조경만, 이수영, 김두섭, 박진국. 이들은 최고 3달러에서 최저 25센트까지 후원하였지만, 대부분이 50센트 내지 25센트를 후원한 데 반해 윤계상은 1달러를 후원하으니 그의 후원액이 적지 않다.
그해 3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가 하나와 라하이나 그리고 기파후루에 거주하던 한인을 위하여 순회 목사를 파송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용운이 권사로서 하나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위의 신한민보 후원 명단의 대부분은 하나 감리교회 교인으로 생각해도 별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윤계상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인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 마련에 크게 힘쓴 것으로 보인다.
1916년 1월에 하와이 지방총회 총회장 홍한식이 책임 임원을 조직하였다. 그때 윤계상은 학무원에 선임되었으므로 이때부터 나라 사랑을 공식적으로 하게 된 것 같다. 그 외 임원은 총무에 안현경, 서기 겸 재무에 이종홍, 법무원에 정운서, 구제원에 승룡환, 군무부원에 손창희 그리고 농상부원에 김광옥이었다.
그해 윤계상은 호놀룰루에 있던 하와이 기숙사학교라고도 불렸던 ‘한인 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당시 이승만은 교장이자 기숙사 사감이었다. 이승만이 1916년 하와이 연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13년 가을에 이승만이 한인 여학교를 시작할 때 여러 농장에서 온 5명의 여학생이 등록하였지만, 1916년에 껑충뛰어 11배가 되는 57명의 여학생이 등록하였다. 1913년 여름부터 1916년 1월까지 후원받은 총액은 7,700달러였다. 이 중 외국인이 지원한 200달러를 제외한 7,500달러를 한인 이민 노동자가 후원하였으므로 한인 여학교는 당시 24달러 내지 30달러의 월급을 받았던 한인 이민 노동자가 명실공히 스스로 지원했던 학교였다. 재학생들은 호놀룰루 한인 제일감리교회에 등록하였고, 매주 주일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으며, 매일 학과가 시작하기 전에 아침 경건회를 했고, 저녁에도 기숙사에서 경건회를 가졌으며, 나이 든 여학생은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였다. 지난 1년간 많은 학생이 세례받았고, 학생 중에는 기독교적 삶을 인도하기로 동의하는 약속 문서에 날인한 자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윤계상을 포함한 학교 당국은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후원자들에게 이들 학생에 대한 애정과 이들 학생을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1918년의 한인 여학교 건물은 3층이었고, 1층은 교회가, 2층은 교실이 그리고 3층은 여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1916년 2월 이후 1년간 윤계상은 안원근, 조석진, 김종운, 유계준과 함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받았다. 그달에 송헌주가 위의 교회 목사로 파송받았고, 김광H가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보고된 교세 통계에 따르면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직원과 교사가 13명이었으며, 등록된 학생은 175명이었다. 그리고 학습 교인이 85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38명이었다. 엡워스 학생은 38명이었다. 당시 예배당이 2곳에 있었고, 두 곳 총 가격이 32,000달러였다. 지출 비용에 따르면 두 건물과 건물 개조비가 6,922달러였으며, 예배당과 사택을 위한 비용이 250달러였고, 예배당과 사택에 진 빚이 4,755달러였으며, 연료 및 전기 등에 쓴 비용이 182달러였다. 1917년 보고가 구할 수 없어 1년간 사역한 결과를 비교할 수 없다.
1917년 12월에 하와이 지방총회 총, 부회장 선거가 있었다. 총회장 후보자는 이승만과 안현경이었고, 부회장 후보자는 윤계상과 손창희였다. 그달 29일에 제1차 보고에 따르면 총회장 선거에서 이승만과 안현경이 각각 63표를 얻었고, 부회장 선거에서 윤계상이 손창희 보다 14표가 많은 70표를 얻었다. 그 후 총회장에 안현경이 선정되었고, 윤계상은 부회장으로 확정되었다.
이듬해 2월에 국민회 창립 제10주년 기념 겸 축하회와 하와이 지방총회 총, 부회장 취임식이 있었다. 그날 오전에 방화중 목사가 사회를 본 가운데 국민회 창립 제10주년 기념 겸 축하회가 있었다. 취지 설명 후 찬송가 제106장을 제창하였고, 한원규가 기도하였으며, 여학원 학생이 창가를 하였고, 이종홍이 하와이 지방총회 역사를 진술하였으며, 밀쓰 학교 학생이 창가를 불렀다.
곧이어 하와이 지방총회 총, 부회장 취임식이 있었다. 웨슬레홈 여학생이 창가를 부른 후 총회장 안현경과 부회장 윤계상이 취임을 맹서하였고, 중앙학원 학생이 창가를 불렀으며, 총회장이 연설했고, 한인 성공회 학생이 창가를 하였으며, 일동이 국가를 부른 후 송헌주 목사가 기도하고 폐회하였다.
그날 오후에는 6개 한인 학교 학생의 체육 대회가 성황리에 있었다. 그해 하와이 지방총회 기타 임원은 총무에 김광재, 서기 겸 재무에 이승만, 학무원에 송덕인, 법무원에 양홍렵, 구제원에 정윤필, 군무부원에 손창희 그리고 농상부원에 서상홍이었다. 그런데 취임식 직후 총회장을 중심에 두고 불거진 논란으로 임시의회를 소집한 가운데 윤계상이 총회장 대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3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윤계상이 한재명과 이태성과 함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받았다. 그달에 보고된 교회 통계를 2년 전의 통계와 비교하면 주일학교는 이전과 같이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직원과 교사는 8명이 많은 21명이었으며, 등록된 학생은 6명이 많은 181명이었다. 그리고 학습 교인이 51명이 적은 34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20여 명이 많은 160여 명이었다. 엡워스 회원은 10명이 적은 28명이었다. 당시 예배당이 2곳에 있었고, 두 곳 가격이 32,000달러여서 같았고, 연료 및 전기 등에 쓴 비용이 138달러가 많은 320달러였다.
그해 12월에 1919년 하와이 지방총회 총회장 후보로 이종관과 함께 윤계상이 피선되었으나 총회장에 이종관이 선임되었고, 윤계상은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 임원은 부회장에 손창희, 총무에 김광재, 서기 겸 재무에 김영우, 학무원에 이승만, 법무원에 서상홍, 구제원에 정윤필, 군무원에 손덕인, 농상부원에 신성일, 중앙대표원에 윤계상 외에 안현경과 류상기였다.
1919년 2월에 발간된 국민보에 윤계상이 “우리의 급무”를 기고했다.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 “고서에 말하였으되 의식이 족한 연후에 반드시 예절을 행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고에 격담이 될 뿐 아니라 금일 우리에 대하여도 적당한 말로 확연히 믿나니 자고이래로 역사를 참고하여 보면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약하면 국민의 마음이 불화하며, 나라가 부요하고 백성이 강하면 국민의 마음이 화하여 온전히 통일함은 역사상에 눈으로 보는 바라. 그러한즉 시대는 비록 고금이 다르나 인심은 결단코 고금의 다름이 없을지로라.... 현금 유지 신사는 말하되 단체를 공고케 함이니 교육이 필요함이니 실업 발전이니 운운하나 이상 세 가지가 긴요치 않은 바는 아니로되 공론에서 지나지 아니하도다. 단체도 재력이 아니면 공고케 못 할 것이오. 교육도 재력이 아니면 장려치 못하며, 실업도 재력이 아니면 발전케 못 할지라. 대저 개인의 생활이 완전치 못하면 모든 계책이 곤란하여 이산함을 면치 못하며, 기한을 견디지 못하여 염치를 불고하겠거든 옳은 사상과 옳은 활동을 해가에 경영하리오. 연래로 사회적 요소와 교육적 요소와 실업적 요소로 유지 신사의 연설과 필단이 신문상에 만폭 기재한 것을 볼 때 우부우부터라도 뇌두에 삭였으나 완전한 결과를 이루지 못함은 실행할 재력이 없는 연고로다.
회라, 우리 동포 형제여... . 금전은 온전히 인류의 활동을 작흥케 하는 기관이라. 그런고로 황금 저축에 주의치 않으면 단체 공고와 교육 장려와 실업 발전은 고사하고 개인 활동도 오히려 불능함은 말하지 않아도 헤아릴지라. 나는 단언하노니 이상 세 조건을 원할 진데 관념하며, 주의할지로다. 재력의 정도를 가히 이룰 목적으로 의식과 비용을 경제하며, 낭비치 아니함이 가하도다.... 만금에 부요도 이것으로 시작하였나니 대저 천하 만물이 적소 성대는 자연한 이치어늘 적은 것은 경히 알고, 큰 것을 중히 아는 것은 인류의 상정이로다. 그러나 물질에 본체를 연구하면 결단코 적은 것이라고 등한히 보지 못할 지라... 하와이에 재류하는 5천명 한인은 시험하여 볼지로다. 매일 매명이 1전씩 저축하면 1일에 50원이오, 1삭에 1,500원이오, 1년에 18,000원이 되니 소불과 5년이면 얼마며, 다불 10년이면 얼마요. 매인이 매일 1전으로 시작하여 5인이... 년 10년을 취집하면 거만의 재력을 이룰지라. 가끔 이 작비는 장래에 희망이니 유아 동포는 심지를 연락하여 경제와 저축을 연구 실행하면 실업도 일로 쫓아 발달할 것이오, 교육도 일로 쫓아 장려할 것이오, 단체도 일로 쫓아 공고할 것이라. 고로 최요 급무는 황금 저축이라 하노라.”
1919년 8월에 하와이 지방총회 선출 중앙 총회 대표원으로 윤계상이 안현경과 함께 출타하여 상해 임시 정부와 교섭하였다. 이듬해 12월에 윤계상은 안현경과 함께 1921년 하와이 지방총회 총회장 후보자로 선정되었다.
하와이 일본 영사관은 윤계상의 나라 사랑과 독립운동을 두고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라는 의미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선별할 정도였다.
윤계상은 1922년 6월 18일(음력 1922년 5월 23일)에 하와이에서 향년 5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빅아일랜드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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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