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이곳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난 1.5세 청년입니다. 일제 지배 때에 한국의 3‧1절 만세 사건이 있었다는데 한국이 일본에 36년간 지배당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이며 요즘 정치권에서 말하는 을사오적은 누구누구입니까?
- 오렌지 카운티에서 유 자매
A: 좋은 질문입니다. 조선말에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강대국사이에 끼여 조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침략야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독차지하기 위해 청일 전쟁와 러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이었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인 레토렛이 말한 것처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일본은 한국을 완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1905년 9월 5일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국의 기득권을 완전히 보장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 파송해 한국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외교권을 이양받고 통감부를 설치하고 거의 모든 전권을 이양받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을사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늑탈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내각의 참정대신(내각수반)이 반대하였으나 5대신의 동의를 받아내는 데는 성공하였습니다. 이 을사조약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했습니다. 을사늑약의 체결에 동의한 다섯 명의 내각 대신은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다. 이 5명을 을사5적이라 부릅니다.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은 모두 재판장, 판사 출신들이었습니다. 이 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외교권을 완전 박탈당하고 보호국으로 전락하여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었습니다.
5년 후인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는데요,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합병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905년 을사조약 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됐고, 이때부터 조선의 치욕스런 일제강점기 3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는 더욱더 높아져 갔습니다.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인사 16명,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 인사 15명 그리고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불교인사 2인이 민족 대표 33인이 구성되었다. 이들의 독립운동 정신은 3‧1절에 대중을 모으고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원칙으로 3‧1절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독립 선언문을 만든 육당 최남진은 교회에서 세례받은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예수님의 산상보훈에 나오는 무저항주의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영감을 받아 독립 선언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03.01.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