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그리스도인의 전쟁관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가)행정부의 기능이다
무엇보다 먼저 어떤 상황들에서 선전포고 여부의 결정은 행정부가 가진 기능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여겨야 하며 국가가 가진 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행정부가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행정관을 세우신 것이다. 그 사람은 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선한 것을 주기 위해 세운 일군이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할 수 있다. 어떤 상황들에서 행정부 또는 국가가 어떤 악하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는 데까지 나아갈 권한을 가지고 있다. 사형판결이 그런 것이다.
행정관이 국가 안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시켜야 하듯이 국가의 외적인 관계에 대해서 역시 같은 일을 하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행정관 역할들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라고 그 사람을 부르신 것이다(롬13:4).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벌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밖에서 다른 국가가 그 국가의 생활을 해롭게 하거나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면, 그 국가의 시민들의 유익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나)최종선택으로서의 전쟁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전쟁은 마지막 선택이어야 한다. 다른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른 모든 가능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조치여야 한다. 국가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최선의 시도를 했는데도 실패하였을 때만 국가는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다)행정관의 확장된 의무로서의 감당할 일이다
국가가 전쟁을 감당해야 할 경우, 국가는 그런 결정이 정당한 사유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한 나라가 전쟁을 하도록 하는 결정은 행정부가 가진 확장된 의무이다. 국가 내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기관이 그런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대의명분이 항상 정당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따라 나오는 것이다. 폭군이나 독재자가 법과 질서를 지키는 일은 하지 않고 직무를 남용하여 스스로 법을 가장 잘 어기는 사람일 경우에 그 정부를 바꾸기 위해 모반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하다. 같은 원리가 여기서 정확히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속한 국가가 의로운 이유를 가지고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면 전체 입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어떤 형태의 호전주의 어떤 형태의 제국주의나 다른 나라 백성들을 희생하여 자기 나라 이익을 위해 의도된 어떤 이기적인 전쟁을 예외없이 분명하게 정죄한다. 만일 몇몇 개인 통치자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근거에서 히틀러(Hitler)나 무솔리니(Mussolini)를 정죄하는 것은 옳았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의 보어족 사이에 금광 채굴 이권과 관련하여 사태가 악화되어 일어났던 보어 전쟁(Boer War, 1899-1902)의 경우, 이 전쟁의 시발 동기와 과정에서 보면, 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이권에 개입하여 급기야 전쟁으로까지 비화하게 한 책임이 있다. 이것은 영국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런 전쟁은 정당성이 없다. 악을 제어할 목적으로만 전쟁을 해야 한다. 다른 어떤 근거에서도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5)그리스도인의 균형 잡힌 전쟁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매우 조심하여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호전주의자는 항상 잘못되었으며, 전쟁을 사랑하는 어떤 누구도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론자만이 항상 옳고 바르다는 것도 동등하게 잘못된 주장이다. 이런 두 극단에 빠진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국가의 기능을 오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항상 악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갈피를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극단에 빠진 그리스도인도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에 나가 싸우면 그 사람이 누구라도 거의 성자로 보아주는 심각한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전쟁하는 군인들과 군대 지도자들을 이상적인 사람들로 추켜세웠다. 1차 대전 때, 기독교회의 강단에서 자기 나라를 위해 전사한 어떤 사람도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주장이며 성경의 정신과도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요한복음의 본문을 남용하기도 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그 본문은 전쟁에서 싸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군대에 들어가 있는 어떤 사람도 일부러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감상적인 이유들을 가지고 본문들을 남용함으로 참된 입장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러면 실제로 전쟁으로 나아가는 나라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 나라가 말하고 행하는 것을 검증해 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 전쟁이 전혀 그릇된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그 전쟁에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런 정당성이 없는 전쟁은 부당하다. 그런데도 전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국가의 지도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 성경 대목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그 전쟁이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어떤 의미에서 그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에는 어떤 잘못도 없지만, 만일 그들이 그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그는 그 전쟁에 나가 싸우기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전쟁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함으로 자기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결과들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자기들 양심에 따라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국가가 존중해주어야 하는 무엇이다. 그래서 세계대전 때 양심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자의 입장을 항상 고려하여 입법을 하였다.
국가는 개인의 양심을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다 자기같이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전쟁에 나가 싸우는 그리스도인이 전쟁을 반대하는 그 반전론자들을 무시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적인 차원에서 이 모든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모반이 일어날 때에 경우도 같다. 만일 그 모반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 모반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없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실례 가운데 하나는 16세기 재침례파(Anabaptist)의 경우이다. 그들은 국가와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세금 내는 것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죽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에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정부에 어떤 방식으로라도 참여한다는 생각 자체가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단적인 생각이며, 그들의 반전론적인 관점은 그 이단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여론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이런 반전론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태도라고 부르는 결과로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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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