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이번 가을에는 여행 복이 많았다. 단풍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막내가 직장 동료 결혼식으로 캘거리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딸과 함께 캘거리에서 만났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도시가 노란 낙엽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 내린 비로 산은 온통 흰 눈이 쌓여서 오랜만에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기쁨도 누렸다. 이른 새벽 동트기 전에 숙소를 나와서 로키산맥 이곳저곳을 하이킹했다. 각자의 일로 바쁜 아이들과 시간을 맞추어 여행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어서 함께하는 시간이 더 감사하게 느껴졌던 한 주간이었다. 캘거리에 다녀온 지 두 주 만에 동생처럼 지내는 집사님 부부의 배려로 스위스를 다녀왔다. 교회사역과 학교 일을 그만둔 내게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은퇴선물로 비행기표를 사 주셨다. 나머지 여행경비는 아이들이 생일 선물로 채워주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하나님께서 생일 선물을 듬뿍 주시는 것 같았다. 일상을 벗어나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삶에 쉼과 배움을 가져온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만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사는 동안에 틈틈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스위스에 처음 간 것은 구 년 전이다. 언니의 육십 살 생일 기념 여행 때 언니가 경비를 부담해주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워낙 기억력이 나쁜 내가 그 여행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몽블랑 정상을 운행하는 조그맣고 예쁜 빨간색 케이블카와 숙소 앞 광장에서 열린 파머스마켓에서 산 정말 맛있었던 산딸기, 그리고 퐁두는 한 번 먹어봐야 한다고 식당에 갔다가 주문을 잘못해서 빵만 한바구니 나와서 치즈에 담가 먹다가 한참 웃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에 루체른 호수에 가서 꽃으로 장식된 카펠다리를 보니 언니와 그 다리에서 사진을 찍었던 생각이 났다. 구 년 전에 루체른에도 들렸던 것이 확실했다. 언니가 아픈데 혼자 스위스에 가는 것이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언니의 칠십 살 생일에는 내가 여행경비를 낼 테니 다시 오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 할 만한 시간도,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는데 언니는 여행은 커녕 삶의 소망마저 사그라져 가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숙소에 들어와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함께했던 여행의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을 하는 언니는 나 혼자 다시 유럽에 가서 미안하다는 말에 내가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이 언니에게도 하나님께도 기쁜 것이라고 거꾸로 내게 위로를 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곳인 융프라우를 간 날은 구름이 많이 껴서 산 밑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매년 71개국에서 백만명의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융프라우에 철도가 만들어진 것은 미래를 꿈꾼 한 사람의 스케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알프스를 산책하던 중 산 정상까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16년 만에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떠나도 그가 남긴 창조적인 유산이 후대에 주는 유익을 생각했다. 스위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방문한 곳은 쯔빙글리가 종교개혁 때 설교를 한 취리히에 있는 교회였다. 설교단에서 힘차게 개혁을 외쳤을 그를 그려 보았다. 우리가 삶을 마친 후 우리의 일생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열매를 남겨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헨리 나우웬의 죽음에 대한 묵상이 떠올랐다. 산 밑에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어디선가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곳, 목에 방울을 단 누렁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스위스를 내 일생에 다시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을 여행에서 주신 풍성함을 마음에 담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linda.pyun@itsla.edu
11.0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