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나라마다 다양한 문화에 다양한 전통적인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의 결말과 교훈은 모두 비슷하다는 사실을 평생 여러 문화권의 문학을 연구했던 앤서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가 발견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야기의 기본 구조나 핵심 메시지는 같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이러한 이야기를 '원형(archetypal)'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원형적인 이야기에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 가난한 노인이 가지고 있던 말 한 마리로 밭을 갈고, 수레를 끌고, 타고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이 벌에 쏘여 놀라 도망쳐 버렸습니다. 노인은 말이 사라진 것을 보고 온 마을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들이 찾아와서 위로합니다. "말을 잃다니 정말 불운한 일이군요." 하지만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불운인지, 행운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라고 합니다. 일주일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잃어버렸던 말이 산에서 돌아왔는데, 자기 혼자가 아니라 야생마 12마리를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뜻밖의 횡재를 한 노인에게 마을 사람들은 찾아왔습니다. "축하합니다! 정말 큰 행운이네요!" 하지만 노인은 또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습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노인의 아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야생마들을 길들이려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길들이는 과정에서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세 군데나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드님이 크게 다쳤다니 안타깝군요. 참 불운한 일이에요." 하지만 노인은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불운인지, 행운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두 주 후, 중국의 두 지역 간에 치열한 전쟁이 터졌습니다. 군대가 마을을 지나가며 50세 이하의 건강한 남자들을 모두 징집해 갔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덕분에 징집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간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우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사자성어로 익숙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ᅠ성경에도 같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닌 만큼, 우리는 어떤 일이 궁극적으로 좋은지 나쁜지를 온전히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겸손과 신비에 대한 열린 마음과 태도를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뿐이며, 우리의 보는 것은 마치 흐릿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전 13:12)고 했는데 '새옹지마' 이야기의 교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특별은총'의 은혜로 성경의 이야기에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선과 악의 본질을 완전히 아시는 분이며, 마치 ‘연금술사’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절망적이고 나쁜 일조차도 결국 놀라운 축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방법이 명확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순간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길을 잃은 말도, 부러진 다리도 결국 놀라운 축복을 가져왔듯이 말입니다.
빌레몬서도 같은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향해 쓴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빌레몬서는 특별히 한 사람을 위해 작성된 성경에 포함된 유일한 개인 서신서입니다. 그 배경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빌레몬'이라는 유력한 유지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통해 빌레몬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이 소유하고 있던 노예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을 훔쳐서 한밤중에 로마로 도망쳐 수많은 사람들 속에 숨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오네시모가 감옥에 갇힌 나이든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항상 그랬듯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불운의 바울과 죄를 짓고 숨어사는 비운의 젊은 노예 오네시모의 만남을 통해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유익한'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네시모의 삶에 들어가시니 "오네시모는 이름만 유익한 자였으나, (그래서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본래의 의미대로 진정으로 유익한 사람"(11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큰 도움을 주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로 인해 오네시모의 삶이 변화되었더라도, 과거를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너는 다시 돌아가 빌레몬 앞에 서야 한다. 그의 용서를 구하고,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보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크게 두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도망친 노예에게 가혹하고 무자비한 처벌을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처형도 노예를 처벌하기 위해 나온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은 과거를 헌 옷처럼 벗어 던지고 무시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복음의 경험이란,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지만 바울이 함께 갈 수 없었기에, 그를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빌레몬에게 관대하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부탁을 했습니다. 돌아온 오네시모를 도망친 노예나 도둑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으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전하며, 빌레몬에게 평생 익숙해 있던 문화적 관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문화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의 노예제도를 끔찍한 악으로 여기며 판단하지만, 200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 시대를 돌아볼 때,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인 거대한 실수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적 회심은 끊임없이 배우고, 다시 배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기존의 가치관을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바울의 빌레몬서는 결국 노예제도의 굳건한 로마제국의 바위를 갈라지게 만든 작은 씨앗과도 같은 편지였다"라고 한 신학자는 말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한 것은 노예를 단순한 재산이나 소유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바울은 주 안에서 친구가 된 빌레몬에게 간청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기회를 주었습니다. 빌레몬서의 이야기 속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전개 과정은 중국의 고전적인 '새옹지마' 이야기와 같은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금술사이신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일하시고 다스리는 분이며, 오네시모의 이야기에서도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셨던 일을 다시금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신약성경의 이 편지에는 아름다운 후속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편지가 오늘날까지 전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바울에게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바울이 분명히 말했듯이, 오네시모는 이제 그에게 정말 "유익한" 사람이었고, 바울은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바울이 가장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 편지가 쓰인 지 50년 후 안디옥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가 에베소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베소 주교의 이름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한때 돈을 훔쳐 로마의 군중 속으로 숨어든 노예가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와 많은 사람의 자비를 통해 초대교회의 주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도망쳤다"며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워할 때, 지혜로운 노인이 "불행인지, 행운인지 누가 알겠소?"라고 했던 것처럼, 노예가 도망쳤다가 돌아왔을 때 그는 단순히 열두 마리 말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을 품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바울의 편지들이 처음으로 모아지고 배포된 곳이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바울의 서신들이 영구적인 그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고, 결국 신약성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들을 수집하고 보급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는 바로 에베소 교회의 주교였던 오네시모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신약성경에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사이에 유일하게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인 빌레몬서가 포함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오네시모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한때 악하고 비열한 일을 저질렀던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통해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었는지를요." 만약 오네시모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바울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는 변화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다시 빌레몬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만약'들 사이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일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제가 왜 "불행인지, 행운인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라는 보편적인 주제가 여기서도 반복된다고 말하는지 이해되시나요? 이 두 이야기는 우리가 겪는 삶의 사건 속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이 일이 나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줄 아는 지혜로운 노인의 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노인과 다르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아 보이는 일이든, 나빠 보이는 일이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정말로 좋은지 나쁜지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소망과 믿음, 그리고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섣부른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비로운 분이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삶 전체를 그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한 선한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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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