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청소년 집회에서 나는 잠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찬양 시간이 끝나갈 무렵, 예배 인도자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주님과 같이(There Is None like You)”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잠시 후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 집회장을 가득 채운 모든 청소년들에게 이 찬양을 불러 주고 싶어 하신다고 선언했다. 예배의 대상이 갑자기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함에서 집회에 참석한 청소년들로 바뀌어버렸다.
나는 순간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찬양 인도자를 통해서 이 찬양을 부르는 내내 참석자들 중 상당수가 울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사랑과 인정을 갈구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배 인도자는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의 접근 방식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함과 배려함으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들의 감정 조종에 집중했다. 만약에 그날 저녁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면 예배 인도자의 찬양 인도방식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기가 있다고 해서 진리가 타협되었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 순간에 옳다고 느꼈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좋은 찬양을 감사하는 설교자이다. 평생 재능 있는 연사, 보컬리스트, 음악가, 음향 엔지니어가 참여한 예배에 참석했다. (이런 인재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나는 부드러운 혀, 기억에 남는 베이스 리프, 적절한 분위기가 집회장 전체를 장악했던 몇몇 사례를 목격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 기쁨, 슬픔, 두려움, 괴로움, 희망 같은 특정한 감정을 느끼라고 하신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시편은 하나님 앞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감정이 풍부하게 담긴 태피스트리이다.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에 예배, 기도, 찬양을 통해 적절하게 표현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자아와 치료 문화의 부상으로 인해서 단지 인간 경험의 일부였던 감정이 이제는 아예 삶을 주도하는 핵심 권위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복음전도를 어렵게 만들며, 특히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변화하는 시대와 연결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와 관련하여 도전 과제를 제기한다.
상황화와 감정
특정 문화에 맞게 복음을 이해하기 쉽고 관련성 있게 조정하는 게 상황화이다. 상황화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독특한 문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됨”(고전 9:22)이라는 말씀에 맞게 가능한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화에는 성경 진리의 신실성보다 문화적 관련성이나 감정적 호소력을 우선시하려는 유혹이 따라온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감정을 형성하도록 하지 않고, 감정이 나의 믿음을 이끌어가도록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정의하는 것이 감정에 달려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느끼는가가 실재 그 자체보다 더 우선시되는 오늘날 문화에서 점점 더 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감정이 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에 감정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부분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감정은 오로지 그의 은혜로 거룩해지도록 의도되었다. 하지만 주도권이 감정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객관적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이 줄어든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보다 나의 감정적 반응을 더 신뢰하게 된다. 특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포스트모던 감성 속에서 복음을 더 수용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형태로 상황화가 이루어질 경우에, 타협의 위협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든지 기독교의 받아들이기 힘든 가르침을 최대한 축소함으로,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또 감정적으로도 매력적으로 유지하고 싶다는 압력에 직면한다. 오늘날 문화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순간 좋은 평판을 한 순간에 날아가도록 만드는 특정한 몇몇 죄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감정적 필요를 해결하고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하려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믿음, 회개, 그리고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는 복음 메시지의 희석으로 나타난다.
이런 현실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복음의 상황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거룩한 감정으로 바꾸라
나의 영웅 중 한 명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The Religious affections)에서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적절하게 일치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의 교제에 더 깊이 들어가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통찰력은 상황화와 타협을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감정을 진리에 대한 장애물이 아니라 기독교 생활의 필수 요소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에만 그렇다는 사실이다. 해결책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우리의 관계, 가치관,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포함한 삶의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감정을 형성하도록 하는 데 있다.
우리의 감정이 말씀에 의해서 형성될 때, 그것은 거룩한 감정으로 승화한다. 은혜로 정화된 상태의 이 감정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거룩한 감정의 지배를 받는 마음은 어리석지 않다. 문화라는 명목으로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유행하는 현존의 가짜 정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진리를 존중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참된 성경적 정의를 추구하는 영적 능력으로 충만하다.
따라서 진짜 도전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형성하는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결코 복음이 담고 있는 감정적 효과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나의 죄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나아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삶의 약속 앞에서 누구나 영혼이 흔들리는 감격을 느낀다. 확신에 찬 영혼은 기쁨과 함께 슬픔을 모두 다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말씀의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오늘날 문화적 바람이나 나 자신에 대해 기분 좋게 느끼고자 하는 인간적 욕망 때문에 감정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감정이 팩트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는 세상이다. 교회는 문화적 맥락을 유지한 채 이웃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도 신실해야 한다는 독특한 도전에 직면했다. 감정이 진리의 최종 결정권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금세 길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포함한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감정(affections)이 오로지 말씀의 진리에 근거할 때, 우리는 복음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상황화라는 복잡성을 더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by Paul Bang, TGC
02.1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