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으로 볼 때 목회자가 만나는 가장 큰 위협 중 하나가 번아웃이다. 그리고 그 번아웃을 일으킬 가장 큰 위협은 설교에 대한 완벽주의 욕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설교를 완벽하게 준비하겠다는 생각이 훌륭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불안이나 탈진, 또는 두 가지를 다 일으키기에 최적의 상황을 만든다.
토요일 아침 운전하는데 아내가 물었다. “설교 준비는 잘되고 있어요?” 나는 다음 주일에 설교가 잡혀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준비에 열 시간 가까이 보냈지만 나는 “95퍼센트 정도 됐어” 하고 대답했다. 95퍼센트라는 건... 사실상 다 끝났다는 의미였다. 설교 준비가 100퍼센트 되었다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R. C. 스프라울은 전적 타락을 “완전한(utter)” 타락과 구별했다. 전적 타락은 죄가 인간 전체에 해를 끼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더 악해질 여지가 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다다를 수 있는 최악의 죄인 상태는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더 많은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설교 준비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게 당신이 주일 아침에 제대로 준비된 설교를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말의 요지는 설교에는 언제나 더 준비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설교 준비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그럼 더 준비할 여지가 있는 한 설교 원고를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까? 아니다.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실패하는 사람의 이유에 대해서 썼다. 그는 재능, GPA, 좋은 시험 점수만으로는 성공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성공하려면 이런 것들도 필요하다. 2.5점을 받아서 하버드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3.8점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때부터 진짜 중요한 건 성적이 아니다. 3.9점과 3.95점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 글래드웰은 모든 부분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특정 “한계점”(이게 핵심이다)의 충족 여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단 한계점에 도달한 경우에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건, 유전, 개인적 양육, 거주지, 네트워크 등등 대부분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한 외적 요소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설교에 이 개념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설교 준비도 특정 한계점에 도달하면(오로지 당신 자신만이 그 한계점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거기에 도달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설교 준비는 끝난 거다. 그걸로 충분하다. 준비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설교 원고에 연연하지 말라. 그 이후에도 설교를 더 준비해야 한다면, 그건 기도와 이미 준비한 내용을 소화하는 것이다. 노트북은 옆으로 치워버리라.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설교 원고에서 문장 한두 개 바꾼다고 해서 설교가 확 달라지는 건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설교 준비에 지름길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설교는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직무이다. 매주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하는 목사는 사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완벽한 설교 원고를 쓰겠다는 욕심은 그 자체가 얼마든지 우상으로 바뀔 수도 있는 진짜 위험이다. 특히 완벽한 설교를 향한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완벽주의가 영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일종의 자기 몰입이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머레이는 ‘리셋’에서 설교 완벽주의 때문에 고생했던 한 학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내가 가르친 신학생 중 한 명은 설교를 다듬고 또 다듬어서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매주 30시간 이상을 투자했다. 그는 결국 일 년도 안 되어 번아웃되었고 사역을 그만두었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한번은 존경받는 어느 신약 학자와 조만간 출간될 그의 서신서 주석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 주석이 언제 완성될지 물었다. 주석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수년간의 연구와 집필 끝에 그는 결국 임박한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더 잘 쓸 수도 있었는데’라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교자도 이 신학자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보통 목요일 오후 또는 토요일 아침 정도에 이런 느낌을 가진다. “이제 다 끝났어. 원고 보는 것도 이제 지쳤어. 솔직히 말해서, 준비하면서 꼼수를 부리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준비한 내용으로 충분해. 책도 열심히 읽었고 기도도 많이 했어.
성경 원문을 조사했고, 구조를 나름 견고하게 구축했어. 말씀 안에서 살았고 설교 맥락에 맞춰서 내용도 보강했어. 이제는 끝났어. 최선을 다해서 설교할 거야.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초라하겠지만,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겠어.”
그 누구도 완벽한 설교 원고로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에 댄 도리아니가 말했듯이, 우리는 언제나 약간의 공황 상태에서 설교한다. 지나치게 준비하면, 특히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서 비정상적으로까지 신경을 쓰면, 보통 진부하고 지루한 설교로 이어진다. 추가로 들인 노력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더 많은 노력이 항상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씀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설교 원고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보다 낫다.
그러니 설교자여, 힘을 내자. 완벽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대상에 서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설교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기준점에 도달할 때까지만 준비하면 된다. 그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토요일에는 설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다.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설교 원고를 한 번 더 가볍게 보자. 교회로 가서 강대상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님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자. 예수님에게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조각을 내어준 소년처럼 말이다.
by David Kaywood, TGC
01.2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