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칼럼니스트)
World Share USA 대표
20세기 프랑스의 기독교(Protestant) 지성이요 사상가인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현대 기독교의 특징적 현상을 “하나님과의 단절”이라 말한다. 그는 하나님과 단절된 이 시대를 붙들고 투쟁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대 성도와 교회가 주목해야 할 말이다.
일찍이 C.S. 루이스는 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 말을 들은 것처럼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을 붙들고 투쟁했다. 루이스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처럼 1세기 선교사 사도 바울도 온 힘을 다해 선교현장을 누볐다. 복음이 닫힌 시대에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과 C.S. 루이스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살펴본다.
첫째로, 두 영웅은 교육열 강한 부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둘은 부모 교육열에 힘입어 당대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선교사 훈련을 충실하게 받았다. 사도 바울과 C.S. 루이스가 최고의 선교사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다는 것이 현대 선교사와 목회자 훈련의 좋은 참고 자료다.
사도 바울의 부모는 신실한 유대교 신앙인으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디아스포라였던 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헬라시대 교육 도시, 다소(Tarsus)에 정착했다. 다소는 그리스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의 요람이었고 교육열이 강했던 교육도시였다. 고대 역사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다소가 알렉산드리아, 아테네와 더불어 헬라문화권 3대 교육도시 중의 하나라고 밝힌다.
또 스트라보는 아테네는 많은 철학자가 상주해서 훌륭한 교사를 보유한 도시였고, 알렉산드리아는 온 세계에서 모은 서적을 보유한 도서관과 훌륭한 대학 시절을 보유한 교육도시였고, 다소는 중산층 부모들의 강력한 교육열을 자랑하는 교육도시라고 소개한다. 다소는 스토아 철학의 스승들과 교육열이 강한 중상층 상공인의 거주하는 교육도시였다.
다소에서 정착하여 아들에게 헬라식 교육 기회를 제공한 사울(바울)의 부모는 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예루살렘에 이주했다. 그들은 총명한 아들을 당시 존경받는 랍비 가말리엘 문하로 성장케 했다.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로, 아버지 시몬에 이어 존경받는 랍비였다. 역사가들은 가말리엘 문하생 중에 기독교 신자가 많았는데 바나바도 그중에 한 사람이라고 전한다.
바울이 받은 교육을 현대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최상의 교육이었다. 세계 최상의 교육도시 다소에서 헬라식 교육을 받게 했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구약과 유대교 신학을 공부하게 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1세기 선교사 사울은 헬라인과 유대인을 선교할 준비를 했다.
20세기 선교사 C.S. 루이스도 탁월한 교육을 받았다. C.S. 루이스의 부모는 강한 교육열을 자랑했다. 성공적인 변호사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 앨버트 루이스는 새집을 짓고 새집의 모든 벽을 책으로 채웠다. 책이 가득한 집에서 아들들이 성장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배려였다.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렌스는 루이스의 어린 시절에 루이스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플로렌스는 아들을 깊이 사랑하고 아들의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진 어머니였다. 사랑과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는 루이스가 9살 되던 해에 사망했다.
C.S. 루이스의 아버지 앨버트 루이스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자 두 아들 교육에 몰두했다. C.S. 루이스의 전기를 쓴 작가마다 아버지의 교육열을 언급한다. C.S. 루이스 아버지는 여러 장면에서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준다. 앨버트 루이스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기숙학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앨버트 루이스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옛 스승 커크패트릭(Kirkpatrick)선생을 찾아 아들을 맡겼다. 루이스의 아버지 앨버트 루이스는 아들 루이스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루이스의 학비를 지원했고,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지원했다.
이런 부모의 교육열에 힘입어 C.S.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읽고 쓰는 훈련을 했다. 특히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만난 커크패트릭 선생으로부터 논리적 사고와 고전어 그리고 유럽어를 익혀서 폭넓은 인문학 공부를 위한 든든한 기초를 쌓았다.
C.S.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유럽의 최고 대학이었고 세계에서도 가장 탁월한 명문대학교다. 루이스는 이 명문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탁월한 학생이었다. 옥스퍼드를 졸업하며 교수로 임용되기를 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루이스는 폭넓은 공부를 했고, 고전 문학, 철학,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루이스의 학습 능력이나 그의 성실성을 고려한다면 교수 임용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사를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루이스의 생애를 보면 이해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20세기 그리고 21세기의 강팍한 심령을 복음으로 설득할 유능한 소통 전문가를 기르셨다.
루이스는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중반에도 호평받는 작가였고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였다. C.S. 루이스는 21세기에도 그 영향력이 지속되는 유능하고 뛰어난 작가다. C.S. 루이스는 많은 사람을 그의 책과 글로서 복음으로 인도한 탁월한 문학(혹은 문서) 선교사다. 지금도 많은 독자를 열광시키는 C.S. 루이스는 탁월한 문서선교사다.
어떤 형태로건 현대 선교현장을 경험한 사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실을 직면한다. 현대 선교의 장벽을 경험할수록 사도 바울과 C.S. 루이스를 생각한다. 두 사람은 현대 선교의 모델이다. 두 선교의 영웅을 본받아야 할 이유가 많지만, 선교사로 잘 훈련된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찌든 상황과 흡사한 선교현장에서 성공적으로 그 장벽을 극복한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해체주의와 다원주의가 횡행하는 현대 문화는 온갖 종교가 자리를 잡은 사도 바울이 방문했던 아테네를 연상케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주창자 중의 하나인 이합 하산(Ihap Hassa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을 1939년 9월로 주장한다. C.S.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가로 부상하던 때다. 당시 영국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운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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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8.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