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경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에 관한 글들
II. 칼빈의 영적인 순례
8. 다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
그 이후로 주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킨 많은 투쟁들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많았다고 말한다. 다윗의 생애 전체를 깊이 생각해볼 때, 그의 걸음걸이마다 칼빈 자신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시편의 말씀들은 칼빈 자신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위로가 되었다. 이 성스러운 다윗왕은 블레셋 사람들과 다른 외국의 국가들, 그의 대적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크게 괴롭힌 것은 그의 동족들 가운데 악의를 지닌 압살롬과 아히도벨과 같은 자들이었다. 칼빈 자신은 사방으로부터 습격을 당한 나머지 한 순간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언제나 안팎으로 공격의 예봉이 꺾이지 않았다. 사탄은 종종 교묘한 술책을 써서 이 교회를 아예 송두리째 뒤엎으려고 획책했다고 말한다. 1540년 경 제네바에서 칼빈의 활동을 공공연히 반대하고 대적한 사람들과 파당들이 있었고, 칼빈은 계속적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1) 3년에 걸친 시련
일단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칼빈은 염려하며 두려움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탄의 치명적인 공격을 깨뜨리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 생명을 위험 속에 빠트리면서까지 사탄의 공격에 정면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의 사악한 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큰 권력을 획득하고 득세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평민들이 이 자들의 유혹과 사악한 계략에 휘말려 무절제한 방종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치리권을 수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했다. 천국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이 세속적인 민중들은 자신들이 요구했던 권력을 일단 얻기만 하면 교회가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자기 멋대로 행동했다. 칼빈은 이 투쟁에 대하여 “나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른 손을 펴시지 않으면 나는 끝장이다”라고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야망 또는 부당이익에 대한 탐욕과 욕구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성품이 굉장히 격해져서 평화롭고 정직한 삶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제어하는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칼빈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까지도 파멸로 몰아넣고 싶어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사탄의 계략에 말려들어 헛되게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저주받은 책략의 궁극적 결과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 치욕적인 파멸을 뒤집어쓰는 것 뿐이었다. 칼빈이 보기에도 이것은 고통스럽고 불쌍한 장면이었다. 그들이 큰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언제나 그들이 잘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들이 모든 선의의 경고에 항상 완고하고 반역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않았어도 칼빈은 자신의 소원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2) 신학적인 논쟁
칼빈에게 5년이나 계속된 이 같은 시련은 매우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는 칼빈이 아마 세르베투스(Servetus)를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1549-1550년이 비교적 조용했던 기간이라면, 5년간의 시간은 1543-1548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는 칼빈이 두 번째로 제네바에 체류하기 시작한 그 이듬해부터 시작된다. 1549-50년의 비교적 조용했던 기간이 지난 후 칼빈은 계속해서 어려움에 봉착했었다. 칼빈은 독기서린 중상모략으로 그와 그의 사역을 끊임없이 공격했던 자들의 악한 의도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상모략하려는 열정에 눈이 멀어 아주 부끄럽게도 자신들의 치부를 일거에 드러내었다.
또 어떤 이들은 대단히 교활하였으며, 그들에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불시에 수백차례나 중상모략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칼빈은 세상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에 칼빈의 가르침에 악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교만한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죄의 창시자는 곧 하나님이라고 떠들어 대었다. 칼빈은 1545년 [자유주의파들에 대항하여]를 써서 이들을 비판했다.
1555년 제롬 볼섹(Jerome Bolsec)이 선동한 지역교회 도당들은 오히려 칼빈이 “하나님의 외적 섭리와 다스림 안에 모든 것을 포함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아무리 조롱 섞인 험담이라도 그런 말에 경솔히 귀를 곤두세우고 듣는 것을 즐거워하는 대중들이 없다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시기와 심술, 불만, 악의로 인해 기괴하리만큼 뒤틀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 같은 사실을 지적해주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갈멜파 수도승 Terome Bolsec)은 택자와 유기자를 구분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뒤 엎으려고 애를 썼다.
또 다른 이들은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칼빈은 자유의지를 옹호하던 알베르투스 피기우스(Albertus Pighius)에 반대하여 1543년 [의지의 속박에 관한 교리의 변호(Defense of the Doctrine of the Bondage of the Will)]를 썼다. 칼빈은 많은 무리들이 그 자유의지를 옹호함에 동조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왜곡된 열정 때움임을 알았다. 이런 난관들을 그에게 가져다 준 장본인이 오직 눈에 보이는 적들 뿐이라면 그다지 참아내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라고 자처하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떡을 먹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하는 사람들, 곧 자신들이 복음전도자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는 자들이 칼빈을 대항하여 이 불행한 전투를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라고 탄식한다. 다윗이 불평했던 내용들이 칼빈 자신에게도 딱 들어맞는다고 한다. 칼빈은 “나와 함께 빵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가 나를 뒷발로 걷어찼도다” “나와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가곤하였던 나의 친한 친구, 나의 동역자가 적과도 같이 나를 모욕했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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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