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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최원숙 (1865-)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원숙은 1865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결혼하여 삼계동에서 거주했다. 그가 살던 삼계동이 경상남도 김해시 삼계동일 것 같다. 하와이 이주를 꿈꾼 그는 39세가 되던 1904년에 혼자서 가방 두 개를 들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 고베에서 코리아 선박을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그해 11월 18일에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최원숙은 자기 이름을 영문 Choi Woon Sook으로 표기했는데 하와이 선교연회록에서 Choi Woon S., Choi Won Sook, Choi Wan S., Cho U.S.로도 표기됐다.

하와이로 이주한 지 6년이 되던 1910년 최원숙은 가와이섬 가파 농장에서 노동했다. 그해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제5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독은 에드윈 H. 휴즈 박사였고, 감리사는 존 W. 와드만 목사였으며, 한국어권 총무는 홍치범 목사였고, 한국어 통역인은 민찬호 목사였다. 그달에 가와이섬에 엘리엘리, 가파, 리휘, 막가웨리, 네 순회 구역이 있었고, 가파 순회 구역에 가파, 긱가하, 길나위아, 세 지방이 있었다. 최원숙은 가파 순회 구역 아래 가파 농장에 있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김영식 목사가 가파 순회 구역뿐만 아니라 리휘 순회 구역에도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러나 가파 한인감리교회에 지방 전도사는 파송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섯 지역을 맡은 김영식 순회 목사가 가파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을 때 최원숙이 예배를 인도하고 목회하였을 것이다. 

최원숙이 파송 받은 그해 3월의 가파 한인감리교회 통계를 따로 볼 수 없으나 가파 한인감리교회가 포함된 가파 순회 구역의 통계를 찾을 수 있다. 학습 교인이 39명이었으며, 세례 교인이 22명이었고, 지난 1년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두 명이었다. 주일학교는 한 곳에만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3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35명이었으나 평균 25명이 출석했고, 이 중 11명이 신자가 되었다. 엡워스 학생회 고등부가 두 곳에 있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25명이었다. 예배당은 한 곳에만 있었고, 당시 시가는 100달러였다. 주일학교에 4달러를 지출했다. 순회 구역 이름이 가파이므로 가파 한인감리교회가 가장 큰 교회라고 생각하면 하나밖에 없던 예배당과 주일학교 그리고 엡워스 학생회 고등부가 가파 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1911년 초에 최원숙이 같은 리휘 농장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1월 17일과 18일 양일 동안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독과 감리사와 한국어권 총무와 한국어 통역관은 작년과 같았다. 그달에 최원숙은 권사에서 지방 전도사로 직위가 상승하였다. 휴즈 감독은 최원숙을 가와이섬 리휘 농장에 있던 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달에 임준호 목사는 리휘 구역 순회 목사로 파송 받아 리휘 지방과 하마마울라 지역을 담당하였고, 기알리아 순회 구역의 세 지역도 담당하여 전도하였다. 그런데 리휘 한인감리교회에 권사는 파송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 목사가 리휘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못했을 때 최원숙 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목회하여야 했다.

리휘 한인감리교회 통계가 따로 없지만 리휘 순회 지역 교세에서 지난 1년간 사역한 최원숙의 목회를 엿볼 수 있다. 학습 교인이 12명이 많은 90명이었고, 세례교인이 한 명 적은 74명이었으며, 지난 1년 동안 유아세례를 받은 유아가 2명이 많은 4명이었고, 세례를 받은 성인은 5명이 적은 15명이었다. 여섯 곳이 적은 두 곳에 주일 학교가 있었고, 7명이 적은 8명의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24명이 많은 235명을 가르쳤다. 엡워스 고등부가 한 곳이 적은 두 곳에 있었고, 등록 학생은 24명이 적은 30명이었다. 한 곳이 많은 세 곳에 예배당이 있었으며, 당시 시가는 400달러가 적은 1,400달러였다. 지난 1년간 지출 결산액은 총 60달러였다. 이 중에 예배당 수리를 위하여 40달러가 지출되었고, 내지 선교/교회 확장부에 18달러를 헌금했고, 선교부 일반 교육비와 주일학교부에 각각 1달러씩 헌금했다. 위의 통계에서 상당수가 최원숙이 지방 전도사로 사역하던 리휘 한인감리교회라고 본다. 예배당과 주일학교 그리고 엡워스 고등부가 있었을 것이다. 

1912년 3월에 개최한 제7회 하와이 선교연회 배쉬포드 감독은 최원숙을 작년에 이어 리휘 지역에 있던 리휘 한인감리교회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임준호를 리휘 뿐만 아니라 하마마울라, 기알리아, 가파 그리고 길나위아, 네 지역을 순회하는 전도 목사로 파송하였고, 작년에 없었던 권사로 고석주를 파송했다. 그리고 그해 속장은 최태진, 최 열, 임편순, 백운탁, 송공선, 유진학, 여섯 명이었고, 주일학교 교사는 고석주였으며, 유사에 유기봉, 김보하, 이주선, 3명이었다. 다섯 지역을 맡은 임준호 순회 목사가 리휘 지방을 방문하지 않았을 때 최원숙 지방 전도사가 고석주 권사와 더불어 예배를 인도하고 심방하였다고 본다. 

이듬해인 1913년에 최원숙은 오하후섬 가후구 순회 구역과 오일루아/목골니아 순회 구역에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하였고, 1914년에도 위의 두 순회 구역에서 순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1914년이나 1915년 초에 그는 오아후섬의 와일루아 농장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2월 24일부터 28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0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독 에드윈 H. 휴즈 박사는 최원숙을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이관묵을 와일루아 지방과 가후구 지방에 순회 목사로 파송하였고, 와일루아 한인교회 권사로 정도옥과 안재덕을 파송했다. 그러므로 이관묵 순회 목사가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을 때 최원숙 전도사가 정도옥과 안재덕 두 권사와 함께 본 교회 예배와 목회를 담당했을 것이다.

그해 2월에 제출된 교세 보고서에는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가 따로 없고, 가후구 한인감리교회와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가 합쳐친 순회 지방 교회 교세가 있을 뿐이다. 학습 교인이 48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28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수는 4명이었고, 세례를 받은 성인은 7명이었고, 한 명의 유아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6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56명이었다. 웹워스 학생회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6명이었다. 예배당이 3곳에 있었고, 당시 시가는 1,700달러였다. 지난 한 해 동안 지출 결산액은 171달러였다. 이 중 예배당 수리비로 6달러를 지출했고, 연료, 전기 등에 30달러를 지출했으며, 교육비로 150달러를 지출하였고, 내지 선교/교회 확장부에 18달러를 헌금했고, 흑인구제부, 교육부, 미국 성서공회에 각각 1달러를 헌금했다. 권사를 두 명이나 파송된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에 예배당이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원숙 지방 전도사가 지난 1년간 목회한 결과는 이듬해 1916년 2월에 제출한 교세 통계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그가 목회한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따로 찾을 수 없고,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뿐만 아니라 가후구 한인감리교회 교세가 합쳐진 교세다. 학습 교인이 39명이 적은 9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56명이 많은 84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자는 8명이 많은 12명이었고, 세례를 받은 성인은 10명이었고, 12명이 많은 13명의 유아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작년과 같은 6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20명이 적은 36명이었다. 웹워스 학생회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명이 적은 15명이었다. 예배당이 작년과 같이 3곳에 있었고, 당시 시가는 300달러가 감소된 1,400달러였다. 

1916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의 사회로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윌리엄 헨리 프라이 목사였고, 한인 총무는 김진호였고, 한인 통역관은 이승만이었다. 그해 한인으로 연회 직원에 김이제가 있었고, 그는 일본인 C. 나카무라와 함께 부회계였다. 

그달에 최원숙은 작년에 이어 오아후섬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그달에 조연택이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가후구 한인감리교회가 있는 지역의 가후구 순회 목사로 파송되었고, 안중수와 박광익이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었다. 작년과 같이 최원숙 전도사는 조연택 목사가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을 때 안중수와 박광익 두 권사와 함께 예배를 인도하고 심방을 하여야했다. 

한 해 동안 목회한 최원숙의 사역 결과를 이듬해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통계와 가후구 한인감리교회 통계가 합쳐진 통계다. 학습 교인이 18명이 많은 27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74명이 적은 10명이었으며, 세례를 받은 성인은 4명이 적은 6명이었고, 10명이 적은 3명의 유아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는 작년보다 하나 더 많은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2명이 적은 4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11명이 적은 25명이었다. 웹워스 학생회 고등부는 없었다. 예배당이 작년과 달리 1곳이 적은 2곳에 있었고, 당시 시가는 1,600달러가 증가한 3,000달러였다. 

1917년에 최원숙은 가족과 함께 같은 섬 목골니아 농장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열렸다. 그해 감독은 애드나 하이트 레오나르도 목사였고, 감리사는 작년에 이어 윌리엄 헨리 프라이 목사였다. 그리고 한국 총무는 임준호 목사였다. 그달에 레오나르도 감독은 와일루아 순회 구역에 조연택 목사를 파송하고, 와일루아 지역과 목골니아 지역 등을 순회하면서 전도하도록 했다. 최원숙은 황계신과 함께 목골니아에 있는 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었고, 권사로 김인걸, 남덕도, 안재덕, 세 명을 파송하였다. 

최원숙이 파송 받던 그달 목골니아 한인 감리교회 교세 통계는 따로 없고,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교세와 함께 와일루아 순회 구역 교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3월에 보고된 와일루아 순회 구역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학습 교인은 22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7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15명이 세례를 받았고, 13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3명이 입교했고, 22명이 학습 교인이 되었다. 주일학교는 한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은 6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37명이었다. 예배당은 두 곳에 있었으며, 당시 두 예배당 시가는 3,000달러였고, 한 해 동안 수리 비용으로 58달러를 지출했다. 한 해 동안 훈련비로 50달러를 지출했고, 다른 목적으로 471달러를 사용했다.

1918년 이후 최원숙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연회록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딸 결혼 증서에서 나타났다. 1925년 10월 21일에 그와 그의 부인 김새라 사이에서 태어난 17세의 딸 최운진이 31살 된 박한봉과 결혼하였다. 딸이 결혼한 지 11년이 되던 1933년 8월에 나온 한인교회보가 그를 소개했다. 그를 다년간 교역에 많은 공헌이 있고 신앙이 독실하였다고 소개하면서 그가 70세 나이에 4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매 주일 걸어서 와이알누아교회 아침 예배에 출석하였다고 적었다. 위의 한인교회보는 그해 7월 9일 홍한식 목사가 출타한 가운데 최원숙이 아침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예배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 후 1940년 인구조사에서 그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76세가 되던 1940년에 그는 호놀룰루에서 민선현의 집에서 혼자 하숙하였고, 그의 아내 이름은 없었다. 그 후 그의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

damien.sohn@gmail.com

 

02.0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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