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드리는 가장 강력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열정의 회복, 뜨거움’이다. 뜨겁지 않으면 타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교회마다 신앙의 감각들이 둔해져 버린 것을 다시 깨우고 살리는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다. 사람은 언제라도 무디어지고 딱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깨트리는 과정이 없다면, 새롭고 온전한 회복과 축복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은혜의 감각, 영혼의 감각
은혜의 감각, 영혼의 감각을 살려내어야 한다. 감각만 살아나면 나머지는 시간문제다. 중환자실의 환자도 손가락 발가락 어느 한쪽을 까딱거리기만 해도 병실에서는 난리가 난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감각이 돌아오면, 이제 소망을 품게 된다.
입에 붙인 호흡기도 떼어 내게 될 것이고, 팔에 꽂힌 링거병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일어나 말도 하고 스스로 입을 열어 밥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퇴원 후 할 일들을 생각하고 마음에 계획을 품은 생각들을 챙기면서, 일상의 삶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이를 가리켜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회복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회복의 시작은 가장 먼저 감각을 가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감각이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정상이 되고 삶의 꿈과 비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상자, 착각과 오해
오늘날 세상이 참으로 감각없이 분주하고 복잡함을 본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속에 묻히고 떠밀려 살아간다. ‘당신, 이러다가 죽는다.’ 그렇게 소리쳐도 못 들은 체 한다. 온몸이 마비되어도 그저 머릿속의 생각과 입만 달싹거려도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착각하고 오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손가락을 까딱하면서 전자기기의 페이지만 넘길 수 있어도, 세상을 다 아는 것 처럼 살아간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전화기를 몸의 새로운 인공장기(Artificial Organs)라고 할 정도의 기형적인 현상들이 나타난 현실이다.
몸에 떼어 놓을 수 없으니, 이제는 예배중에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인권침해의 한 부분이 될 수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24시간 전화기가 없으면 그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편리함에 경도되어 버린 것이다.
편리함과 영혼의 가치
편리함은 좋은 것이다. 불편함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힘들게 만드는가? 그런데 문제는 영혼이다. 외형적인 삶은 편리하고 좋아졌는데, 그 영혼의 상태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심각하게 죽어 가는 상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상실의 중증에 빠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은혜의 감각을 상실하고 서서히 마비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그 자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주의 종들이 외쳐도, 마치 돌들에게 외치는 것처럼 왠만해서는 미동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익숙해져가는 삶의 편리함들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영혼의 상태와 영적인 감각들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진짜 이상해졌다. 저분이 저렇게 행동하고 말할 분이 아님에도, 이상해졌다. 공중을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붕 떠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이상함을 본인은 감각하지 못한다. 주의 자녀가,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함에도 아무런 이상증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어느날 성도로서, 직분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 조차 무시하는 삶의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기초와 기본의 상실
예를 들어, 믿는 사람이 교회를 그리워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몸을 움직여 오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주간 주일을 빼 먹고 어디 여행을 다녀와도, 십일조 정도는 살만할 때 하는 것이지 하면서 그렇게 살아도, 전혀 마음에 1도 거리낌이 없다면 정말 이상한 양심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이런 가장 초보적인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율법주의라고 많이 듣고 보고 배운 언어로 규정해 버린다. 자신이 원하고 동의가 되면 모두가 은혜이고, 자신이 하기 싫거나 부담되는 것은 모두가 율법주의 같은 고상(?)한 이름들을 붙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세상에 교회가 왜 많은 줄 아는가? 자유롭게 자기 성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성도 없는 교회 보았는가? 성도라는 소비자의 입장과 형편에 맞추어야 하지 않는가? 자신의 마음이 동하여 교회 쪽으로 오고 싶을 때까지는, 귀찮게 하지말라는 귀차니즘(?)의 세계를 주장한다. 심각한 징후가 찾아온 것이다.
무기력, 영적 우울감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가? 생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따스한 물에 삼켜지는 개구리처럼 감각을 서서히 잃어버린다. 뜨거움을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그가 택한 자녀라고 할 때, 심각한 영적 우울감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을 본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주의 자녀가 마땅히 생각하고 행할 것을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기쁨과 감사,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성령께서 그에게 구원의 특별은혜가 아닌, 일반 은혜들을 거두어 가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매사에 부정적이 되는 것을 본다. 영혼에 아무런 유익함이 없는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것을 본다. 마침내, 주님앞에 회개할 말과 일들만 잔뜩 쌓아두는 것을 본다.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기쁨이 없는 얼굴이 된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즐거움과 방종의 기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상하고 존귀한 하늘의 은혜의 맛을 이미 알았는데, 그 감동들이 그 영혼 한켠에 오롯이 남아있는데, 이를 이끄시는 성령님이 탄식하고 계신데,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 맛을 다시 맛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뎌할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은혜의 감각을 회복
그래서 성도가 은혜의 감각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성도가 실수로 음주 방종을 하면 더 빨리 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감각이 살아있음의 복된 증거가 된다. 알콜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고,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져서 쓰러지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중직이면서도, 나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얼굴에 표시하나 없고 멀쩡하다고 자랑하는 이를 본 적이 있다. 빨리 돌이키지 않으면, 그에게 그것은 엄청난 불행의 전조가 될 것이다. 죽을병이 들기 전까지는 그 감각을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가 도적질을 하면 화인 맞은 영혼이 아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야 한다. 더 심장이 빨리 뛰고, 피가 빨리 돌고, 폐로 호흡하는 것도 어렵게 되어야 한다. 아주 좋은 증상이다. 왜 좋은 것인가? 영혼의 감각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를 생각해보라.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고, 애매한 말을 하고, 없는 일을 말함에도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담대함이 아니라 영혼에 죽을 병이 든 것과 같은 일이다.
영적 은혜의 스파크
그러면, 이미 감각이 둔해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흔들어 깨우면 된다. 마치 심장이 멎었으면 전기 충격기를 실행하여 스파크를 내듯이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난다. 은혜를 감각하기 시작하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나면 사명 위해 달려갈 수 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엄청난 회복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최소의 기본기를 회복하고, 이를 기준점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에 나아오는 것이다. 예배의 자리를 수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액을 들어야 한다. 은혜가 되던, 아니되던 계속 말씀과 기도,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의 상함과 고통이 있어도, 교회로 몸을 가지고 와야 한다. 넘어져도 교회쪽으로 넘어져야 한다. 잠이 오지 않으면, 밤새 뒤척일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하는 교회와서 자야 한다.
그렇게 잠든 자신의 영혼을, 감각없는 영혼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무감각함이 많아질 때, 성회를 여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에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성회로 모였듯이, 성회를 통해 영적 스파크가 심령가운데 떨어지면서,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
그러나 너무 감동에 집중하지 않도록 주의함도 필요하다. 은혜와 감동은 다르다. 근거있는 감동이 은혜이다. 근거없는 감동에 자꾸 눈물 흘리다 보면, 마치 홍수 날에 마실 물이 없음같이 더욱 갈증만 더할 뿐이다.
교회와 예배
교회와 예배, 예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감각 없는 삶을 회복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됨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교회 앞으로, 예배 앞으로 나아와 회복을 간구하고 소망함이 영적 회복의 지름길이다. 넘어져도 교회 쪽으로 넘어져 보라. 주님이 받아 주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3.1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