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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임준호 (1874-197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에와 한인감리교회 (1914년)

 

임준호(任俊鎬)는 1874년 10월 6일에 서울에서 태어나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 대학부에 다녔다. 그때 우남 이승만이 급우였다. 그는 28세에 19세의 부인과 결혼하여 딸 봉순을 낳고, 서울 정동에서 거주했다. 결혼한 지 2년이 되던 30세에 그는 아내와 한 살 된 딸 봉순과 함께 두 번째 하와이 노동 이민선 코리아 선박에 승선하여 1904년 9월 5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글자로 Im Choon Ho 또는 Lim Choon Ho로 적었다. 

임준호는 가족과 함께 에와 농장으로 이동했다. 그는 빼어난 영어 실력으로 현장 감독이 되었고, 농장 진료소에서 통역을 맡았으며, 노동 계약 중개인을 역임했다. 1906년 12월 2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공진회가 조직될 때 민찬호, 이내수, 임정수 등과 함께 임준호도 함께 했다. 본 회는 하와이 교포의 자치, 민족의식 고취, 생활 개선, 전문문화 수호를 목적했는데 이후 인재 육성과 독립운동 자금 확보까지 넓혔다. 

하와이에 온 지 7년이 되던 1911년에 임준호는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로부터 순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의 임지는 가와이섬 동부의 가파, 기알리아, 길나위아로 지정된 가파 순회 구역과 리휘와 하나마울루로 지정된 리휘 순회 구역이었다. 그가 파송된 때 가파 순회 구역에는 세례교인 1명과 학습 교인 12명이 있었고, 예배당이 한 곳에 있었으며, 리휘 순회 구역에는 세례 교인 75명과 학습 교인 78명이 있었고, 예배당이 두 곳에 있었다. 

임준호는 1912년에도 가파와 리휘, 두 순회 구역에서 노동하는 한인 노동자를 전도하는 순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는데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 산하 한국어권 총무까지 역임했다. 그는 1913년에도 위의 두 순회 구역을 위한 순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러나 가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가파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12월에 리휘에 융동 학교를 신축하였다. 부근 3, 4곳의 농장에 흩어져 있는 한인 어린이를 위하여 농장 집 한 칸을 빌려 가르쳤는데 협착하여 교장이었던 임준호가 300달러의 건물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농장 주인과 웰컥스 부자가 다소간 보조하였고, 백인 부인 이샌벅은 50달러를 기부하였으며, 하와이 선교연회에서는 10달러를 후원하였다. 

1914년에는 임준호가 오아후섬의 에와/와히아와 구역 순회 전도사로 파송되었고, 이듬해인 1915년에 집사 목사 곧 준회원이 되어 에와/와히아와 구역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에와/와히아와 구역에 세례교인은 27명이었고, 학습교인은 13명이었고, 1,00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그는 1920년에 에와 인근의 와이파후에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하였으나 1922년에 이곳 한인 노동자가 이동하여 그 교회가 문을 닫았다. 

임준호의 열심에 감동한 백인 퍼시 폰드가 기부한 땅에 임준호는 1923년에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을 세웠다. 그는 1925년까지 에와/와히아와 순회 구역을 섬겼다. 그해 유아세례교인이 8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1명이었다.

1925년 1월에 정원명, 강영호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를 조직할 때 현 순, 정봉관 등과 함께 임준호가 이사부원으로 선임되었다. 위의 후원회가 단산시보를 발행한 그해 5월에 한국에서 6, 7년간 교육에 종사하던 이귀봉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는데 누아누 청년회 종교부 주최로 이귀봉을 초빙하여 임준호의 사회하에 환영하고 그의 연설을 들었다. 그해 8월에 1만 달러로 건설한 호항 한인 미국 감리교 학생기숙사를 가을 개학 이후 확장하면서 학생을 모집하기로 하였는데 이사부 임원으로 임준호가 선출되었다. 그달에 정월라가 주장하여 미국 감리교 주일 학당이 매우 성장하였는데 임준호도 교사 중 한 명으로 가르쳤다. 

임준호는 1926년에 마우이섬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마우이섬 이곳저곳을 순회하면서 라나이, 부네네, 라하이나, 하나에 각각 교회를 세웠다. 1927년에도 마우이섬 스프레클스빌 지역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1927년에 임준호가 평안북도 선천 대동 고아원에 얼마의 기부금을 보내 모국을 위한 사랑을 표했다. 1929년 3월에는 독립 원조를 결의하고 이환일이 회장이 되고, 박기홍이 서기가 되고, 총무에 임준호가 선정되어 한 명당 매끼에 쌀 한술씩 모아 조국 독립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1929년에 4월에 임준호는 한인교회보 마우이 지사원을 역임했다. 1권에 20센트였고, 반년 구독에 1달러 20센트였으며, 1년 구독에 선금이면 2달러였다. 그해 6월에 부네네 교회와 엡웟 청년회가 합동하여 해변 소창회가 있었는데 간략한 예배에서 임준호가 설교하여 청중이 크게 감화를 얻었다.

1930년 1월에 대한 독립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로 중력을 집중하고 최후 1인 최후일각까지 분투하기로 하고, 하와이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임준호 외 28명이 발기하여 임시 위원장에 조용하를 선정했다. 1932년 1월에 교민 총단장 손덕인의 사회로 제12회 통상 의사회를 열고 총단장의 통유서를 낭독한 후 무궁화 1절과 임준호의 기도로 개회하였다. 이날 부네네 의사원으로 임준호 등 11명이 출석하여 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의사장에 강영효가 선정되었다.

`감리사 푸라이 박사가 1933년 5월에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였다.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이윤호 전도사가 통역하였는데 교인이 크게 감화받았고, 설교 후 최일복 부부가 두 아들 로버트와 겔노드를 안고 강단으로 나가서 감리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은 후 제3장을 일제히 부른 후 폐회하였다. 

1934년은 다양한 일이 일어났다. 파이아 제당회사 실험실에서 다년 근무하면서 교회를 크게 돕던 오용운이 1934년 5월에 득남하였는데 아기도 충실하고 산모도 건전하였다. 브네네 제1동 교회가 예배당이 퇴락하여 수리하기로 하였는데 300달러나 들겠다면서 농주가 그 절반을 후원하였으나 한인이 낸 기부금이 60달러밖에 되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임준호가 백인 친구에게서 90달러를 기부받아 그해 7월에 수리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에 함호용 전도사의 차녀 점순이 호항 천주교 간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10월 주일 오후 3시에 위닝 목사 내외와 프라이 감리사가 브네네 제1동 교회를 방문하였으므로 원근 각지에 있던 70여 명의 교인이 모여 환영회를 개최하였고, 그날 위닝 목사가 ‘천연적 물질의 증명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설교하였고, 예배 후 목사실에서 만찬을 나누었다. 그해 11월 첫 주일에 임준호가 라나이 교회를 방문하여 오전과 오후에 예배를 인도하였고, 김현구의 자녀 홍주와 홍우와 홍의, 김성수의 자녀 명규와 웅애, 최영기의 자녀 춘실과 헌실과 헌백, 이경재의 딸 귀태, 정응선의 아들 귀영과 제아이너, 총 10명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그해 한인교회보 11호와 12호에 임준호가 아래와 같은 “신랑이 오신다”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하였다. “성경에 예수님은 신랑이라고 하셨고, 믿는 자는 신부라고 가르쳤습니다... 시집갈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에 적당한 예비가 있어야되겠습니다. 첫째로 물질상 설비도 있어야 하겠고, 둘째로 행동 범절이 신랑의 요구하는 이만큼은 되어야 하겠으니... 신부 에스더가... 규례를 다 배워... 택함을 입었으며... 등불을 예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영접하여 잔치에 들어 갔고... 신랑이 오신다는 소식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잔치도 갖추어진 모양인데 오직 신부만 예비가 부족한 듯합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습니다... 근래에는 세상 사조의 풍파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상 성곽이 파괴되어 전후 잡탕스러운 오락 등 교회마다 충만하여져서 진실한 신자들은 오히려 어리석고 우매한 자들 축으로 밀쳐버리고 마는 도다. 그러한 고로 교회는 점점 쓸쓸하여지며 감동될 만한 기도의 능력을 얻지 못하는 터이며, 많은 무리가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 무슨 주의, 무슨 주의하며 불합한 주의자로 심지어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생겨서 어두운 사람들의 정신을 현황케하는도다. 반성합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런고로 마땅이 정신을 차리고 존절히 함으로 기도하라 (벧전 4:7)... 쇠는 동록이 삼기고, 나무는 좀이 삼키며, 사람은 교만이 집어삼킵니다. 온유한 자는 복있는 자로다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는 자는 복 있는 자로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듬해인 1935년에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는 지난 몇 년과 같이 1월 첫 주일에 저녁마다 기도회로 모여 첫 이틀간은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하여, 다음 이틀간은 애인 여기기의 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다음 이틀간은 교회의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기도했다. 그달 6일에 프라이 감리사가 라나이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근 300명이 모여 교장 최영기의 인도로 화환을 걸어 환영을 표하고 주일 오후에 사무회로 모여 최영기를 책임전도사로, 김정석을 부전도사로 선정하였다. 그날 저녁에 한인과 백인이 함께 모인 만찬회에서 감리사가 4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건물을 얻어 주고, 의자도 사놓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우태형은 풍금을 기증하여 신년 벽두에 큰 은혜가 넘쳤다. 

그해 3월에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 콜스택 박사와 호놀룰루 기독청년회 총무 윌키와 감리사 프라이 박사 내외가 방문하여 저녁 7시 반에 제1동 한인감리교회 예배당 헌당식에 참여했다. 100여 명이 모여 감독의 설교를 들었고, 설교 후 감독은 한국인의 신앙심에 관하여 소감을 밝혔다. 그는 ‘한국인은 금강산과 같이 고강 정숙하여 비록 질풍 악우와 같은 험한 시험이 닥칠지라도 조금도 뒤돌아서지 않고, 한국에 있을 때 알게 되었지만, 한인은 어려서부터 태산 같은 중책의 짐을 지고 목적지에 기어코 도달하려고 했다. 여러분의 얼굴에 기쁨이 있고, 단아하게 단장한 예배당을 볼 때 감동하였다.’라고 말했다. 

임준호가 그해 9월에 흉복증으로 브네네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차도가 있어 귀가한 가운데 가족과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였다. 

1941년 9월에 임준호가 하나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고 설교하였다. 흩어져 노동하던 한인 동포 수십 명이 출석하여 하나님 말씀에 갈증 난 사람 같이 말씀을 청종했다. 그들은 임준호에게 자주 심방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길이 험하고 너무 멀어 발걸음이 어렵겠다고 걱정하였다. 

임준호는 휴직한 지 3년 후인 1946년에 오아후섬의 와히아와 감리교회 한어부 설교 목사가 되어 2년간 섬겼고, 1958년에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3년간 섬겼다. 1967년에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네바다 연회에서 임준호는 은퇴했다. 은퇴한 지 7년이 되던 1974년 4월 21일 주일에 호놀룰루에서 향년 100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호놀룰루 한인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그는 네 아들과 여섯 딸과 22명의 손자와 14명의 증손자를 두고 홀연히 하늘로 갔다.

damien.sohn@gmail.com

01.1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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