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오스틴 주님의교회)
평범한 삶과 비범한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학력, 고소득, 높은 지위, 많은 유산, 고도의 정신력, 고매한 인격 등이 그 차이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의 시련이 닥칠 때 이러한 것들은 무색하게도 한계를 드러내며 본성의 민낯을 보인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예와 부와 고학력을 가진 자라도 지속적으로 본성을 자극하는 삶의 시련 앞에서는 그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우리 가운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군사요 사명을 받은 자로서 신실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왔지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어떤 일로 정서적인 타격을 크게 입으며 감정의 손상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설령 고학력과 존경받는 인품을 소유했다 해도 그 타격 앞에 무력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해 왔음에도 시련이 남긴 감정의 손상 앞에는 자신의 전 존재가 바람 앞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촛불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적, 신앙적 비범함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일반인과 동일한 감정과 의지의 사람이었다. 그는 사명을 이루어가며 당한 수많은 시련 속에서 어떻게 꿋꿋하게 부르심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인간의 연약함을 거부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도 인간이기에 감정적인 손상을 입는 많은 상황이 있었지만, 그 속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본성적인 자기감정에 응하는 대신 다른 것을 주목한 데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라는 기치 아래 정신적인, 육체적인 모든 시련을 당당히 맞서며 풍전등화 같은 삶의 위기를 오뚜기처럼 이겨가며 부르심을 이루어간 것이다. 결국 인생의 비범함이란 인간이 가진 능력의 내용에 있지 않고 본성적인 감정을 초월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을 느낀다.
그 믿음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며 구원해 주신 하나님, 나를 향한 사랑이 너무도 커서 당신의 손바닥에 내 이름을 새기고 계신 하나님, 우리의 구원의 보증을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며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깨달음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이끄심에 나의 감정과 지성 그리고 의지를 굴복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올바른 판단이라 여겨지더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모본이다. 철저한 인간으로서 로마 시대의 사형 틀인 십자가를 지고 싶었을까? 얼마나 이 일이 괴롭고 힘든 일이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멀리해달라고 기도드렸을까?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한다.
무엇이 그를 한 인간으로서 비범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자신을 이 땅에 보낸 분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받드는 데 있었다.
인간으로서 비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규명한 비범함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주목하며 그의 뜻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인간의 비범함은 개화를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인생은 유한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올해 독자들의 마지막 달은 모두가 비범한 12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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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