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1. 올해 첫 날을 세도나에서 맞았다. 한국에서 온 언니와 형부가 귀국하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한 짧은 여행이었다. 새해 첫날 해 뜨는 광경을 본다고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한 달 동안 계속 대가족이 어울려 지내느라 조용한 개인 시간이 그리웠던 내 마음을 딸아이가 알았는지 “우리 새해 첫날이니까 각자 묵상하면서 산으로 올라가요”라고 반가운 제안을 했다. 삼십 분 정도 모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른 새벽이어서 바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했다. 산길이기도 하고 군데군데 있는 작은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어서 당연히 발을 비춰줄 빛이 필요했다. 셀폰에 있는 flashlight을 의지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캄캄한 길을 비추는 flashlight을 고마워하면서 걷는데 시편의 말씀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삶에 많은 변화를 맞고 있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새해 메시지였다. 한 걸음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앞일을 알 수 없는 나의 삶을 인도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셨다. 올 한 해 동안 주님의 말씀을 내 발에 등, 내 길에 빛으로 삼고 하루하루를 묵상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등이 되시고 빛이 되셔서 새로운 한 해를 지켜 주실 것임을 말씀하셨다.
2. 산 중턱쯤 올라가니까 어둠을 뚫고 새벽이 다가오면서 산의 능선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산들이 떠오르는 아침 햇빛 속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산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는데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앞날도 이미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미리 볼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우리의 앞 날도 아름답게 그 형체를 드러낼 것을 생각했다. 좋으신 아버지께서 자녀 된 우리를 위해 이미 마련하신 선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삶의 전환기 속에 새해를 맞이하지만 이미 주님이 계획해 놓으신 미래임을 기억할 때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이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이미 아시고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응답해 나가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세도나를 떠나던 날 새벽에 한 번 더 가까운 산에 올랐다. 뒤에서 따라오는 언니를 위해 셀폰을 앞뒤로 흔들며 내 앞과 언니 발 앞을 밝히며 걸었다. 앞뒤로 손을 흔들며 가다가 앞서가는 사람의 안내자 역할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 때면 부르던 “빛 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라는 노래가 있다. 2절은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누구든지 앞서가는 사람은 뒤를 따라오는 사람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것이 선한 영향력이든 좋지 못한 모습이든 우리 삶의 발걸음은 뒤따르는 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인생의 앞길을 걷는 사람은 뒤를 따라오는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삶의 선배의 역할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모방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새 육십 중반을 넘어 이제 노년기라는 단어가 생소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에는 나의 노년기도 잘 준비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노년기를 은혜롭게 맞이하고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노년기 준비 중 하나는 앞서 인생을 걸어 온 사람으로서 체득한 지혜를 뒤를 따르는 세대의 앞길을 비추는 데 사용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좋으신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후대들이 평탄한 삶을 맞이하기를 바라지만 삶의 어려움이 온다 해도 늘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본을 보이는 노년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 빛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매일 배부르게 잘 받아먹고 꼭꼭 씹어서 말씀이 이끄는 삶으로 풍성한 한 해를 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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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