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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속의 소망

변명혜 교수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한 해가 저물어간다. 곳곳마다 화려한 장식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알린다. 상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는 선물을 사러 나온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동네마다 반짝이는 불빛과 예쁜 장식으로 단장한 집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진정 기뻐하는 마음으로 불빛을 밝히는 집들도 있을 것이고 별 의미없이 절기에 따라 단장을 한 집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슬픈 장소인 묘지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온다. 묘지 이곳저곳에 먼저 떠나보낸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포인세티아나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등이 쓸쓸하게 놓여져 있다. 베버리힐스, Brea 등 여유 있는 지역에는 온 동네가 크리스마스 장식을 예쁘게 해서 구경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올해에는 한국에서 다니러 온 언니 부부와 함께 리버사이드에 있는 역사적인 호텔인 Mission Inn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러 갔었다. 작년에 호텔과 인근 크리스마스 빛의 축제 점등식에 참여한 사람만 오만명, 크리스마스 라잇 구경을 온 사람이 오십만 명이라니 대단한 규모이다. 호텔 주인이 지역사회 사람들을 위해 매년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한다는 정신은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통하는 것이었다. 호텔 내부는 식당을 예약한 사람이나 투숙객만 입장이 허용된다고 해서 호텔 주변만 걸어 다녔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작은 불빛들과 곳곳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길 가에 세워 놓은 Love, Joy, Hope 라는 큰 글자판이었다. 사랑, 기쁨, 소망 세 단어 모두 기독교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이지만 그중에서도 hope (소망)이라는 단어가 특별히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지만 유난히 올 한해는 아픔이 많은 해였다. 국제적인 정세도 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개인적으로도 쉽지 않은 해였다. 주변에 있는 분들의 형편은 더 어려웠다. 갑작스럽게 어린 손녀들과 며느리를 남기고 떠나간 아들 때문에 가슴이 먹먹한 친구, 계속되는 불경기로 부진한 사업 때문에 동동거리는 친구, 불치의 병으로 하루하루 뼈만 남아가는 우리 언니, 사춘기를 지나가느라 손목에 자해를 하는 딸을 보며 당황스러워 하는 엄마, 암과 투병하는 제자, 남편의 분노 문제로 상담을 구하는 사모님 등… 그 아픔의 자리에는 별 소망이 없어 보인다. 나에게는 그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마음만 쓰이고 애만 탈 뿐이다. 새벽기도 시간, 국가와 민족과 정부를 위한 기도를 하자는 목사님의 말씀에 눈을 감으니 말 못 할 아픔 가운데 있는 곁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아닌 말없는 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소망이라니. 

 

최근 몇 달 동안 마음의 슬픔을 꾹꾹 누르며 지낸 것 같다. 애써 평안을 유지하려고 몸부림 친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연한 척, 괜찮은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친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지금 저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매우 피상적인 기도로 느껴지네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이 더 큰 짐으로 다가옵니다.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로 인해 낙심한 이웃들의 모습 앞에 저도 지치고 마음이 무너집니다. 이제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조용히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신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네가 짊어질 그 짐을 내가 이미 대신 졌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나를 신뢰하고 의지하거라.” 이천 년 전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천사들이 찾아와서 슬픔과 괴롬이 많은 이 세상에 위로와 평안을 전했다면 우리도 이 세상을 살 동안 주님이 주시는 소망 안에 찬양으로 화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리라.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오늘도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밝히는 불꽃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 안에 담긴 소망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 빛을 찾는 우리에게 어둠을 뚫고 내려오신, 그 어떤 크리스마스 장식보다 아름다우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lpyun@apu.edu

01.0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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