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
며칠 전에 양파를 사러 동네 마켓에 들렀다. 여러 종류의 양파들 중에 “rescued organic onion, 구출된 유기농 양파”라는 꼬리표가 달린 양파가 있었다. “구출된 양파”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가까이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에게 물었더니 양파가 조금 못생기고 작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모양이 자잘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 버릴 수도 있는 것을 싸게 팔면서 구출한 양파라고 부른 것이다. 크기가 조금 작을 뿐이지 멀쩡한 양파를 싸게 파니까 좋아라 하고 한 자루를 사 들고 와서 이런저런 요리에 잘 사용하고 있다. 못생긴 모습으로 인해 버림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구출된 양파를 먹으면서 흉악한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건져 내신 그 은혜가 새삼스러운 것은 최근에 겪은 친구 권사님의 죽음 앞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그 날이 있음을 기대하는 영생의 소망만이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재작년부터 곁에 있는 친구들이 매년 한 명씩 주님께 갔다. 누군가는 죽음을 자주 보는 것이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표시라고 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구절은 대학 시절 성경 암송을 할 때부터 이미 머릿속에 인식된 진리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정을 나누며 살던 친구들이 곁을 떠난 후 문득문득 떠오르는 옛 추억들을 삼켜 내는 일은 슬픈 일이다. 이번 7월의 마지막 날 주님의 부름을 받은 분은 내가 이전 교회 교육부에서 일할 때 사역을 시작한 첫 주부터 그만두던 날까지 십이 년 반 동안을 한결같이 교사로 도와주셨던 권사님이다. 주일 예배 후 교사회의 시간은 늘 권사님이 준비해 오신 군고구마 등의 간식으로 풍성했고 내가 그 교회를 떠난 후에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시게 되어서 십년 넘는 시간을 언니처럼 곁에서 늘 나를 챙겨 주셨다. 내가 7월 초에 아픈 언니를 보러 한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도 같이 저녁 식사를 했고, 잘 다녀오라며 손을 꼭 잡고 인사를 하셨기에 교통사고로 인한 권사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권사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순수한, 진실된, 한결같은, 편안한…” 이런 단어들이다. 여유가 없는 생활이셨지만 무엇이든지 나누기를 좋아하던 권사님은 김치를 많이 샀다고 문 앞에 갖다 놓고 가시기도 하고, 사과가 크고 맛있다고 들고 오시기도 했다. 우리 막내가 선교를 갈 때면 김치 병에 한가득 모은 동전을 선교헌금이라고 주시기도 했다. 작년에는 장로님 댁 감나무에 유난히 감이 많이 열렸다고 감을 따러 오라고 하셨다. 내가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감이 다 떨어질 무렵에야 장로님 댁을 갔더니 주렁주렁 열린 감을 거의 다 따먹도록 바쁘다고 못 가고 있는 나를 위해서 감 몇 개를 나무에 남겨 놓으셨던 사랑이 많은 권사님이셨다. 떠나신 후에 권사님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그 분의 순수함 때문이리라. 장로님이 권사님을 위해 마련한 화환에 적힌 ‘여보, 이제야 당신이 보이는군요’라는 글은 언변도 없고 겉으로 드러남도 없었던 그러나 진실했던 권사님을 그대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우리는 죽음의 시기도 모르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지 죽음의 모양도 모른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은 더 충격적이고 불행한 일로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우리의 죽음의 모습과 시간마저도 완전한 것임을 슬픔 속에서 고백하게 된다. 권사님의 장례식을 마친다음 날 주일 예배 시간에 아직도 멍한 내 마음속에서 “영광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의 찬양이 터져 나옴은 하나님 존전에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계신 권사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심이다. 이 땅에 살면서 정을 나누고 살았던 것이 헤어진 마음에 슬픔과 아픔을 주지만 죄로 인해 멸망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해내신 주님 때문에 오늘도 슬픔 가운데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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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