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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을 만나며”

조용중 선교사 (KWMC 사무총장, Ph.D)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 곧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전 1:1)로 시작된 베드로 서신에 갑바도기아라는 지명이 나온다. 또한 사도행전 2장 예루살렘 성령의 강림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이 지역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9)의 언급을 보듯이 유대인들의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 터키의 중부내륙지역인 갑바도기아 지역이다. 갑바도기아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오랜 역사 동안 다양한 문화를 거치며 융합의 상징으로 만들어 주었다. 히타이트는 철기와 법률의 혁신을 남기고, 페르시아는 행정과 교역의 기반을 남겼으며, 헬레니즘은 예술과 철학을, 로마는 도로망과 초기 기독교의 확산을, 비잔틴은 기독교 신학과 암석 교회를 남기고, 이슬람은 모스크와 상업 네트워크를 남겼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며 믿음의 후손들이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갑바도기아 지역에 가장 먼저 살았던 사람들은 히타이트 제국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히타이트 제국은 튀르키예의 동북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발원하여 제국을 이루었다. 히타이트(Hittites, 기원전 1600년~1200년경)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강력한 제국으로, 갑바도기아의 초기 문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법률과 행정 시스템을 발전시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법전을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상대적으로 인도적이며 처벌보다는 보상에 중점을 두는 것이 특징이었다. 행정적으로 지역을 소규모 관할 구역으로 나누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 관리를 배치하였다. 그들의 종교적 특징은 다신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자연신과 전쟁신을 숭배하였다. 신과 인간의 계약 개념이 히타이트 종교에서 발전하였으며 이는 근동지역의 종교 사상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의 수도 하튜샤는 강력한 방어 요새와 성벽으로 유명하며 갑바도기아 지역에도 히타이트식 방어 건축물이 남아있다. 바위에 새겨진 신전과 비문은 히타이트 예술과 종교의 흔적으로 보여진다. 히타이트는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와 교류하며 국제 조약을 체결한 최초의 제국 중 하나였다. 카데쉬 조약 (기원전 1259년)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으로 유명하다.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200년경 바다 민족의 침입으로 수도 하투샤와 주변 도시들이 파괴되고 가뭄, 내란, 경제적 붕괴가 겹치며 제국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기원전 1178년경 제국은 멸망하고 중심 정부가 붕괴되었으나 소규모 히타이트 도시국가들이 시리아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존속하였다. 

이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8세기 경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되었고, 히타이트 문화는 주위의 문화와 동화되어 점점 사라졌다. 히타이트인들은 아나톨리아 중심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은 현대 터키인의 조상 중 일부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문화적, 유전적 흔적을 어느 정도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후에 수많은 민족들 (페르시아, 헬레니즘 그리스인, 로마인, 셀주크 튀르크인, 오스만인 등)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히타이트의 유전적 기여는 오늘날 터키인들에게 희석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쿠르드인과 시리아인들로 히타이트 유산의 간접적인 후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언어와 관련된 일부 요소가 고대 시리아 지역 언어와 융합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히타이트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히타이트인이 인도유럽 민족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히타이트인의 먼 조상은 오늘날 인도유럽 민족과 언어적 뿌리를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멸망 이후에도 언어적 영향을 미쳤으며 일부 단어와 개념은 고대 근동의 언어들과 융합되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들의 종교적 유산인 자연신, 태양신, 폭풍신을 숭배한 것들은 후대 근동 종교 특히 후르리인과 아시리아인의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폭풍신의 숭배는 후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폭풍신 바알 숭배로 이어졌다. 히타이트의 건축 양식, 예술, 법률 체계는 이후 아나톨리아 지역 문화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현재 터키의 고고학 유적지는 히타이트의 유산을 증언하며 오늘날 터키 정부는 이를 자국의 문화적 기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히타이트 제국의 후손을 특정한 현대 민족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어렵다. 히타이트 제국 멸망 이후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아나톨리아 지역에 유입되며 융합되었으며 여러 민족 세력들의 유입으로 히타이트 혈통은 희석되었다. 또한 언어가 기원전 7세기경 소멸되었고, 그 이후 아카드어, 아람어, 그리고 튀르크어로 대체되었다. 또한 그들의 종교와 문화는 이슬람화된 터키와 쿠르드 지역에서 더 이상 독립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히타이트의 유산은 오늘날 터키, 쿠르드, 시리아 민족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있으며, 그들의 문화, 언어, 법률, 종교적 유산은 아나톨리아 지역의 후대 문명에 통합되어 오늘날 터키의 문화적 정체성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킨 주원인이 되었던 바다 사람들은 그 기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 이집트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람세스 3세가 기록한 메디넷 하부 비문에 따르면 바다 민족은 여러 집단들의 연합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성경의 블레셋과 연관이 있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이인과 관련의 가능성이 있으며, 세켈레쉬라는 시칠리아와 연관될 가능성이 있으며 아나톨리아 남서부의 루키아인과 관련이 있을만큼 지중해 동부와 서부의 여러 지역에서 유래한 집단들의 연합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주로 경제적, 환경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들이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를 포함한 주요 도시를 공격하고 약탈함으로 멸망에 이르게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집트와 충돌하여 공격하였으나 람세스 3세 (기원전 1186-1155년)의 저항에 의해 패배하였다. 그들은 동지중해의 많은 문명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켰다. 이들로 인하여 청동기 시대가 끝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키는 동기를 제공하였지만 스스로 기존 문명과 동화되어 그들 독립적 정체성을 크게 남기지는 않았고, 그 이후 일어나는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보여진다. 문화의 뿌리가 약한 세력은 다른 문화를 파괴는 할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당시 큰 제국을 이룬 바벨론은 갑바도기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를 만들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의 역할을 하였다.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졌지만, 이는 나중에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는 기반이 되었다(사도행전 2장). 갑바도기아와 바벨론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로 쓰임 받았다. 갑바도기아와 바벨론은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졌지만, 유대인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으며, 페르시아의 구속적 역할을 기다리는 여정 가운데 있었다. 

갑바도기아는 다시 새롭게 부상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 대왕 (고레스왕)은 메디아 왕국과 리디아 왕국을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539년 고레스왕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는 칙령을 내렸다(에스라 1:1-4). 이 시기에 갑바도기아는 리디아 왕국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리디아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로 간주되었다. 갑바도기아는 소아시아와 중동을 잇는 교차로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일부가 페르시아 제국 전역, 특히 갑바도기아 지역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빌론에서 생산된 직물, 금속 제품, 곡물 등이 갑바도기아로 수출되었으며, 갑바도기아는 구리, 철, 말 등 자원을 공급했다. 이 과정에서 갑바도기아는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바벨론 제국 시기에 사용된 아카드어와 아람어는 갑바도기아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아람어가 행정 언어로 사용되며, 바벨론과 갑바도기아 간의 언어적 연결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언어적 유산은 이후 기독교 시대에도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아람어를 남겼다. 

바벨론 제국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삼았다면, 페르시아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자유와 귀환의 길을 열어 주었다. 갑바도기아는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신앙을 유지했던 곳 중 하나였다. 갑바도기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적 기초에 기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농업, 목축업, 광업(특히 철과 구리)이 발달하였고 페르시아 군사와 건축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였고 무역로의 확장은 갑바도기아를 국제적인 교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갑바도기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사 전략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국의 동쪽(중앙아시아)과 서쪽(그리스, 소아시아)을 연결하는 방어 요충지로 사용되었다. 갑바도기아 출신 병사들은 페르시아 군대에 편입되었으며, 특히 기병으로 활약했다.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시스템은 갑바도기아에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도입하였다. 갑바도기아는 페르시아의 20개 사트라프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이 된 것이다.  총독은 지역의 세금 징수, 치안 유지, 군사적 책임을 맡았다. 이는 이후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행정 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가 구축한 왕의 길 (Royal Road)은 갑바도기아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을 연결하며 무역과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였다. 왕의길은 페르시아의 수사(Susa)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소아시아를 거쳐 에게 해 연안으로 이어졌다. 갑바도기아 지역은 이 길의 중요한 중간 지점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정복지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면서 자신들의 제도를 도입하는 융합적 통치 방식을 사용하였다. 에스라서에는 다리우스왕이 예루살렘에서 성전 재건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느헤미아에게는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는 갑바도기아에서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불(화염)을 신성시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은 갑바도기아 지역의 종교적 관습에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페르시아 건축과 예술 양식은 갑바도기아의 도시와 유적에서 발견된다. 궁전, 성벽, 도시 설계 등에서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의 갑바도기아 지배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끝났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남긴 유산은 이후 헬레니즘,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시기까지도 이어졌다.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힘을 얻은 강력한 헬레니즘은 갑바도기아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지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부하들에 의해 나뉘어진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서 그리스-마게도니아식 행정 체계를 받아들이며 기존의 페르시아적 요소와 융합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갑바도기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계속 받아 그리스적인 요소가 정치와 문화에 스며들었다. 헬라어가 국제 공용어로 자리잡았으며 갑바도기아에서도 상류층과 행정 관료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이후 기독교 전파 시기에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됨에 따라 헬라어의 사용은 갑바도기아에서 기독교의 확산을 촉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헬레니즘 문화는 갑바도기아에 철학과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게 하여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등의 사상이 전파되었고, 이는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은 종교, 예술, 건축등 다양한 방면에서 갑바도기아에 영향을 끼쳤다. 갑바도기아의 기존 신앙 체계인 자연신 숭배와 그리스 신화가 융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예술과 건축에도 영향을 주어 바위에 새겨진 초기 기독교 교회와 성화 (프레스코)는 헬레니즘 예술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헬레니즘 예술의 특징은 사실적 묘사로 인간의 감정과 동작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공간과 대칭성을 보여주며 조화를 중시하고, 상징주의적으로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인간의 아름다움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후에 나타나지만 갑바도기아 궤레메의 암흑교회에서 나타난 성화의 대칭성구조와 상징성은 헬레니즘의 영향이 로마시대를 맞을 때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dr.yongcho@gmail.com

 

02.15.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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