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미 성도 (베델교회)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나는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한국에서는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공부와 밝은 성격으로 늘 인정을 받으며 살아왔었다. “나 같으면 부족한 게 없지!” 하고 생각하며, 남들에게 칭찬 받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리플레이하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미국 땅을 밟으면서, 나의 자존감을 지탱해주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다. 우월감을 자랑으로 삼았던 나는, 미국사회에서 “비주류"가 되자 깊은 우울감에 허덕이며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분노를 놓지 못했다.
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셔서, 내 노력을 헛되게 만드셨을까? <탕부 하나님>은, 불신자들도 알만큼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관한 책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주일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별로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방탕한 둘째 아들에 관한 고찰, 탕아 같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극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내가 이 누가복음 본문에 대해 들어왔던 수많은 설교들은 대개 이 레퍼토리를 따랐다. 하지만 모태신앙이자 주일 학교 모범생이었던 어린 나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은혜를 모르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 아들처럼, 나도 날라리 같은 인생을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경험할 수 있는 걸까? 깡패였다가 예수님을 뜨겁게 만나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간증을 들을 때면 억울하기까지 했다. 나의 착실함, 나의불순종하지 않음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데 결격 사유가 된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 집을 떠나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반항심이 공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 나도 탕자 같은 죄인이지"하고 되뇌이며, 인위적인 회개를 반복했었다.
저자는 익숙하다 못해 시시해져 버린 이 이야기가,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부"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이 비유를 진짜 이해하려면,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이 내러티브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 나갈까? 평소 故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하며 들었기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비유의 1막은 둘째 아들의 충격적인 요청으로 시작된다. 이 아들은 멀쩡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무례하게 요구한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그저 유산을 물려받는 수단으로만 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버지는 이 무엄한 요구에 승낙한다. 뿐만 아니라, 이후 유산을 전부탕진하고 돌아온 철없는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열어준다. 집안은 물론 지역 사회의 수치가 된 아들에게 본인의 옷을 입혀주며, 가장 비싼 살찐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는 엄격한 가부장 사회아래 살고 있던 당시 청중에게,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다 못해 충격적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이 이야기의 핵심이라면, 1막에서 이야기가 끝나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2막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하신다고 말한다. 2막에서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패륜아와도 같은 동생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한다.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아버지를 욕보인다. 이에 아버지는 분노로 반응하는 대신, 잔치 자리를 잠시 떠나 첫째 아들을 마중 나온다. 이 또한, 엄격한 가부장 사회였던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혼내는 대신, 잔치에 함께할 것을 제안하며 달랜다. 첫째 아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고조되는 가운데, 이야기가 끝난다. 우리는 맏아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알 수없다. 왜 열린 결말로 이야기가 끝났을까? 저자는 이 비유의 청중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침으로써, 죄인들의 친구 되신 예수님을 못 마땅히 여긴 맏아들과 같은 청중이 대신 반응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나아가서 저자는 두 아들은 행동 양상만 달랐을 뿐, 둘 다 아버지와 멀리 있었다고 말한다. 자기 뜻을 달성하는 방식만 달랐을 뿐, 두 아들 다 아버지보다 아버지의 재물을 원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아 발견”의 길을, 다른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길을 택했지만, 둘 다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둘 다 틀렸다! 나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해석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어떤 문학 작품을 읽든지 작가가 의도한 청중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한데, 왜 이 비유의 청중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또한 나는 형의 불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순종적인 삶을 산 자의 억울함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형의 분노가 자신을 “인류라는 죄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지 않는"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나는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둘째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맏아들 또한 애정 하여 잔치 밖으로 마중 나온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미국 사회의 “비주류"가 된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분개하던 나의 모습이, 불평 많은 첫째 아들과 얼마나 닮아있었던가! 나의 의를 변호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던 모습 이면에는, 남들보다 낫지 않으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했었다. 그러나 이 두려움에서 나를 해방시킨 것은 내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문 밖으로 나와 나를 설득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했던 교만한 자아가 하나님의 주도적인은혜를 만나자, 비로소 나의 성취주의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이를 “의의 뿌리까지 회개하는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죄만 회개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잘한 일의 동기까지 회개하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다. 저자는 율법주의자와 쾌락주의자 형제, 그리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 외에도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비유 전에 제시하신 두 가지 비유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비유다. 세 비유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린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앞의 두 비유와 달리 탕자의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가서 아들들을 대하기는 하지만, 아들들을 직접 찾아 떠나시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적 장치라고 주장한다. 앞선 두 비유와의 대조를 통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은 “진정한 형”의 모습을 동경하게끔 유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영광스러운 하늘에서 비천한 땅으로 내려오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으시는 진정한 형인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해석이다.
저자는 이 비유를 분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책을 마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간단하다. 바로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되새기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이게 다인가?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믿기 어려운 좋은 소식이다. 비록 주님께서 나를 맏아들의 원망에서 해방시켜주셨지만, 여전히 내 방식대로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은 죄에 대한 처방으로 “종교적 행위"를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처방으로 “은혜”를 내리신다. 말씀을 더 많이 읽는 것, 기도와 봉사를 더 많이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실패로 끝나는 노력에 지친 나를 변화시킨 힘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끊을 수 없는, 너무나도 무모해 보이는 사랑. 이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여전히 나의 마음의 동기를 정화시킨다. 이 감격이 여전히 나의 행동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이야기의 히어로는 방황하는 우리를 위해 진정한 형을 보내신,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탕부” 하나님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이야기는 “동생 못지않게 형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두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故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 누구도 복음의 은혜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내가 율법주의에 찌들어 있든 죄에 찌들어 있든, 진정한 형인 예수님만 있으면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지 않다! 나는 삶에서 그리스도를 얼마나 숙고하고 있는가? 히브리서 저자가 권면하듯, 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더욱 더 깊이 생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믿는 친구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선물해주고 싶은 귀한 책이다.
02.1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