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석 목사 (주의길교회)
내가 팀 켈러 목사님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한국의 친구 목사님을 통해서였다. 친구 목사님은 서울의 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도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차에 팀 켈러 목사님의 목회 철학과 사역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을 잃고 연구하던 중에 내가 한국을 방문 했을 때 나에게도 팀 켈러 목사님을 소개하며 그 분의 두꺼운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었다. 팀 켈러 목사님의 목회에 대한 소개와 신학적 배경과 사역 원리를 설명하는 책이었는데, 이 후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에게 진실하면서 영혼을 위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목회 방법이 매우 창의적이지만 진리 안에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배울 것이 많은 목회자요,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이 책 『탕부의 하나님』 역시 나에게는 새로운 통찰과 반성을 일으키는 거센 파도 같은 책이었다. 먼저 나는 팀 켈러 목사님의 책 『탕부의 하나님』에서 두 아들에게 배분한 지면의 양을 주목했다. 거의 정확히 3분의 2를 큰 아들의 상태를 다루는데 활용한 것을 본다. 그것은 팀 켈러 목사님이 주 독자층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고려하여 글을 쓰려고 하였는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당시 특정 계층의 사람들, 말하자면 그 당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 사회의 큰 아들들이 예수님에게도 역시 구원해야 할 잃어 버린 자들로 여겨 지셨다는 것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변하지 않는다. 두 아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은 아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바 형들의 이런 모습의 이유는 "눈 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라는 데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형들은 그저 의무감으로 아버지와 함께 한다. 아버지의 일을 하고 아버지의 지시를 따른다. 그 순종의 배경이 되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지적한다. 더 정확히는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이라 말한다. 즉 형들의 순종은 복음에 기초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과 위치를 사수하기 위한 복종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복종은 자기 의로 쌓여져 결국 이 행위적 복종의 대가로 아버지의 것을 요구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고 어느덧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서 아버지와 대결하는 구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형들에게서 나타나는 병적 증상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금은 고통스럽게, 아니 사실은 매우 아픈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여간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극하고 화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늘 감정을 잘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것이 통제되지 못할 때가 있고 느닷없이 그 벽을 허물고 나타날 때가 있어 가끔은 나 자신도 놀라곤 하는데, 팀 켈러 목사님의 담담하지만 정확한 분석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형들은 자기 결정에 기초한 순종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 밖에서 의의 성을 쌓으며 그것으로 존재 가치를 삼기 때문에 이를 건드리거나 무너뜨리면 불을 뿜어 낸다는 것이다. 세상을 "불행과 불화"에 빠트린다고 팀 켈러 목사님은 지적한다.
유독 자기 변호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며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어 하는 것이 나를 평가하고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이에 대해 마음을 굳게 다 잡아도 이런 상황이 오면 내 얼굴이 이에 대한 불편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왜 그 지적이 틀렸는가를 설명하는데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변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탕자의 형들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크고 엄청난 진동이 나를 때렸다. "자기 변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너무도 부끄러웠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나의 벌거벗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이 글을 혼자 읽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형들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차라리 동생처럼 한대 맞고 '아, 아프다.' 하고 끝나는 것이 나을 성 싶은데 형들은 더 참혹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저자는 그것을 드러내고, 나는 또 이것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해당사항이기에 온 몸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형들처럼 자기 의에 기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내면적 증상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부수적인 증상으로는 기도생활이 건조하다는 것이 대표적이고, 아울러 기쁨으로 올려 드리는 찬송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 나는 잘 알 수 있다. 내 신앙 생활이 엉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는 저자가 지적한 그런 경향이 나타남을 나는 많이 경험했다. 하나님의 일을 누구보다 성실히 감당했다고 자부하며 보낸 지난날들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지만 그 가운데 기쁨의 찬송이 있었고 눈물 어린 감격의 기도 생활이 있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사실 할말이 없다. 그러나 그 세월을 누군가 폄하한다면 나는 또 열을 올리며 나를 변호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였노라고,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었노라고! 그래서 나는 확실히 형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독후감을 쓰면서 지나치게 자조적인 투로 써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그 핑계를 저자의 단어 선택에 돌리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기가막힌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신의 한 수라 생각된다. 바로 탕자의 "형"이 아니라 "형들"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탕자와 그 형"이라고 하면 그 스토리는 그저 단순한 교훈이요 성경 속 이야기로 끝이 나 버린다. 그런데 "탕자와 그의 형들"이라고 하면 스스로 그 비유 속 형 같은 많은 이들이 자기를 떠 올리게 된다. 그 "형들"이라는 단어는 당시의 바라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그리고 이 시대의 나를 그 자리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팀 켈러 목사님은 많은 지면을 "형들"을 다루는데 할애 하면서 동생에 비해서 훨씬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있는 대상으로,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기가 더 어려운 사람들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버지 곁에 설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동생과 매 한가지의 길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이다. 『탕부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신성 모독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확연히 이해가 갔다. 작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있을 수 없는 요구 조건과 그 태도를 보면서 탕자라고 말 할 수 있다면, 큰 아들이 마음으로 아버지를 이미 멀리 떠나 아버지의 권위를 묵살하고 오히려 아버지를 잘 못된 길에 서 있는 사람인 듯 정죄하는 모습을 또 다른 탕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두 아들을 그저 사랑으로 기다리고 보듬으려는, 어쩌면 문제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무조건 적인 수용적 태도의 아버지도 분명 탕부라고 불릴 수 있을 듯 하다.
저자는 말한다. "아들의 자격과 노력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방적 마음으로 아들의 가난과 누더기를 덮는다."라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형들의 무리 가운데 내가 서 있고, 스스로를 비유속 탕자의 형과 다를 바가 없음을 자책하는 마음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탕자로 머무는 것일 뿐이다. 수 십 년 목회를 하며, 그리고 인생의 중반기를 지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는 것 외에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목회도 주님 때문에 여기까지 해 왔고, 가정도 주님 때문에 잘 지켜 졌으며, 내 인생도 주님으로 인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의를 변호하기에 열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형이 형의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했으니 그 위험 지대는 벗어 나도록 하자.
02.1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