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베르너 렘케(Werner Lemke)는 유년 시절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는데, 연합군이 진격해 오는 바람에 온 가족이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막막한 심정으로 짐을 꾸린 뒤,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그 때 베르너의 형이 “잠깐만!” 하더니 피아노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가족이 평소에 즐겨 부르던 찬송을 연주했습니다.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님이 세상 풍파 중에도 늘 보호하시리.....(개역개정 71장)’ 가족들은 함께 찬송을 부르며 주님이 정말 그들의 도움과 소망이 되시고 피난길에도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담대함과 평안함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힘든 피난 생활을 잘 극복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소망을 ‘영혼의 닻’(히 6:19)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고 했습니다. 예수님 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풍파가 밀려와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큰 빛으로 오셨고 죽음의 땅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그것은 인류에게 최대의 소망입니다. 영원히 파멸에 빠질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신비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후 동침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신비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여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를 낳은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무엘을 낳은 한나, 세례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 등이 대표입니다. 그래도 저들은 모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였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신비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만일 동정녀 탄생이 아니었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구주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아담의 죄가 유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모혈을 통해서 태어나는 인간은 다 아담의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남자로 인하여 예수님이 잉태되었다면 그분도 역시 인간이며 죄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이요 인간입니다. 석가모니 역시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죄인이요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인간의 죄를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그 분 몸속에는 죄인의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에 성육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죄인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자로서 씨가 아니라 밭입니다. 밭은 심겨진 씨를 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내고 팥을 심으면 팥을 냅니다. 좋은 씨를 심으면 좋은 것을 내고 나쁜 씨를 심으면 나쁜 것을 냅니다. 즉 마리아는 밭으로써 죄의 씨를 심으면 죄의 것을 내고 죄 없는 씨를 심으면 죄 없는 것을 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면 죄 없는 자를 낳고 사람으로 잉태하면 죄 있는 자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사실 마리아는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순결한 여자입니다. 그가 남자를 모른 채 임신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정혼한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안 요셉도 갈등하며 고민했지만 성령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오시는 메시야 예수님을 잘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면 신앙의 기본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이 믿어질 때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도 의심 없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우리의 믿음은 견고한 반석 위에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 ’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뜻은 “여호와는 나의 구원”입니다. 우리 인류는 모두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저주와 멸망에 빠져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살 길이 막연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 죄에 갇혀 있던 상태. 그분이 죄에 갇혀 있던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무런 희생 없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1976년 6월 27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에어 프랑스 139편 항공기가 중간 기착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내렸다가 이륙한 직후 아랍계 테러범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납치된 여객기엔 유대인 79명을 포함한 248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당시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이 대통령으로 있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으로 갔습니다. 범인들은 엔테베 공항에 인질들을 억류한 채 각국에 수감 중인 53여 명의 동료들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즉각 비상회의를 열고 구출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구출작전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군사 전문가들도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거리도 멀거니와 이디 아민 대통령은 인질범 쪽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공대를 파견했습니다. 항공기가 납치된 지 일 주일 지난 날 자정, 엔테베 공항의 정적은 갑작스러운 총 소리와 폭발음으로 깨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특공대원 100여명은 수송기를 타고 저공비행으로 엔테베 공항에 와 착륙합니다. “번개(썬더볼트)”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전에서 전광석화 같은 공격으로 특공대원들은 인질범들을 작전 돌입 몇 분 사이에 모두 사살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송기가 착륙해서 이륙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2분. 이 작전에서 이스라엘 특공대의 희생자는 단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바로 현장에서 특공대를 지휘했던 당시 서른 살의 조나단 네탄야후 중령이었습니다. 조나단 네탄야후는 수많은 인명을 구조하고 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희생은 마치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아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그 사람은 실패의 인생이요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구원을 받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시려고 오신 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도 포기하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믿어지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 23:4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에도 임마누엘의 신앙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며 살았던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제 마음 깊숙히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그리고 여호와이레입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에벤에셀의 은총이 너무나 커서 감사가 넘칩니다. 공부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했는데 하나님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생각하면 임마누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 가정, 자녀, 경제, 대인관계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 여호와이레의 은총이 믿어져서 두려움이나 염려나 걱정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함께 하셨고 현재에도 함께 하시고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 때문에 사는 것이 참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훈련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택하여 그를 데리고 정글 속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그곳에 혼자 남겨놓고 돌아와 버립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깊은 밀림 속에서 혼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아이는 크게 놀랍니다. 왜냐하면 밤새도록 자기 혼자인줄 알았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기 아버지가 완전무장을 하고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아이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하,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셨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 아이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항상 지켜준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되새겨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합니까? 이 임마누엘의 축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최대의 축복이요 선물인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성탄절이야말로 소중한 날이요, 소망이 넘치는 날인 것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확고한 사람은 낙심할 처지에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할 위기에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그 분이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세상에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주의 왕이신 그 분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며 나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우리는 항상 예수님만이 가장 귀중한 보배임을 시인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분을 마음 가장 중심 자리에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쁨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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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