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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생애와 작품들 (3)

오엔은 전 생애를 쉼 없는 학문연구와 목회자로서 열정적 삶에 바쳐

최후의 청교도신학자로 종교개혁 이후 가장 심오한 신학저서 저술자

 

 

6. 형식과 제도를 배제하는 하나님중심 사상

 

개혁주의 신학자 패커(J.I. Paker)는 ‘성경적 신앙이 하나님중심 사상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다름 아닌 오웬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스펄전 역시 오웬을 칼빈과 칼빈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보았다. 

오웬의 저작들에는 펠라기안 이래로 면면히 흐르는 소시니안, 알미니안주의와 같은 이성주의, 인간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로마카톨릭의 형식주의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의 어조는 마치 하나님의 정염(情炎)에 불타는 구약의 선지자와도 같이 분노로 격앙되어 있었다.

1673년 그동안 장로교회와 독립파 회중교회의 목사들은 각 교구에서 자주 대립하였는데 리챠드 백스터의 제안으로 장로교회와 독립교회가 연합하자는 운동에 오웬이 적극적인 노력으로 많은 갈등이 해소되었다. 오웬은 가톨릭식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교회의 교구제도와 한 교구 내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되 이를 노회단위로 모이게 하는 일에도 반대했다. 

개신교 진영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일은 매우 절실하였던 과제였고 공적인 일에 항상 관여하여왔던 그는 즉각적으로 환영하며 참여하였지만 그러나 의회는 비국교도들에게 관용을 허용치 않는다고 발표하여 고난과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그의 남은 인생을 반 추방형식으로 집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목사요, 설교가로서 오웬의 문서 활동이 크게 증가하는 시기였고 그의 저술은 우리 세대의 청교도 비국교도주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오웬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다.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 후 31년간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이혼 후에 친정에 돌아와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 메리 루크를 잃었으며, 18개월 후 재혼하였다.

 

7. 그의 작품들

 

그는 80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1647년에 그의 저작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죽음의 죽음”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속죄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진술로 인정받았다. 1677-8년에 그는 기념비적인 “성령론”의 전반부 두 부분을 간행하였고, 1681년에 3편의 고전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론”, “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가 그것이다. 

1656년에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죄 죽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 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저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그 뒤를 이어 1658년에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6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세 권의 책은 신자에게 내재하는 죄에 관하여 철저하게 파헤친 책이다. 죄의 존재와 작용,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은혜의 결핍, 실제적인 죄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또한 순종과 유혹 사이에 있는 인간의 시험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죄를 죽임에 대한 의미, 필요성, 적용과 그 방법까지 전개해 나간다.

 

8.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

 

존 오웬(John Owen)은 뜨거운 가슴으로 사역했던 목회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만을 더욱 더 즐거워했고 건장했던 그는 완전히 쇠잔해졌다.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고된 업무로 인해서 완전히 탈진 상태에 빠진 것도 여려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다. 그는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연구와 목회자로서 열정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 1683년 8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런던 번 힐 묘지에 묻힘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나는 교회라는 배를 폭풍의 바다에 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나 같은 사공 한 사람이 사라진들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위로의 유언을 남기고 오웬은 이 땅을 떠났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청교도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웬의 전집을 독파했던 패커(J. I. Packer)는 그를 일컬어 “성경에서 파악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드러내는 진실함, 당당함, 그리고 위엄에 있어서 필적할 사람이 없는‘ 사람으로 평한바 있다.

younsuklee@hotmail.com

0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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