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가 분명한 인생
어떤 집을 방문해보면 여느 집과 달리 아이들이 막 망나니처럼 뛰어다니지 않는 집들이 있다. 가난한 집인데도 아이들 표정들이 밝다. 어른이 오면 인사를 먼저 하고는 자기 일을 한다. 나중에 밥 먹을 때만 슬그머니 나오는 그런 집이 아니다. 식사를 할 때도 먼저 숟가락 들지 않고 반찬을 하나 집중적으로 공격하지도 않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런 애들이 있다. 그런 집안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모른다. 그런 집안을 뭐라 표현하는가? ‘뼈대 있는 집안, 명문가’라고 말할 것이다. 가난하지만 지킬 것을 지키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위와 같은 부러움의 소리를 한다면 아마도 ‘꼰대’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의 모습이 어떠한가?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가급적 조용히 복귀하면 된다고 한다. 게다가 퇴근하며 분주한 소리라도 내게 되면 애들 공부하니 조용하라는 소리를 듣기가 일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가정의 리더라고 정해 주셨건만 아버지들의 핍박(?) 간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실은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 아니거니와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지킬것을 지키는 아름다움
말세의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부모를 거역한다고 말씀하신다. 종말의 현상에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 오늘날 삶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자기가 좋아야 남이 좋은 것도 의미가 있기에 주변의 이목에 상관없이 오직 자기만의 만족과 기쁨을 구하는데 대단히 열심이다. 돈이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하며 부모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해 불순종과 거역을 말과 표정과 얼굴로 쉽게 드러낸다. 일상의 보통 태연한 가정의 모습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녀가 반듯하여 가정에 질서가 잘 잡혀있는 가정을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뼈대 있는 명문가문의 특징이 무엇일까? 지킬 것을 지키는 가문이다. 기본이 된 가정이다. 이런 집안을 보면 참 부럽고 좋다. 그래서 그런 집 애를 데려다가 며느리삼고 싶고 사위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돈이 없다 뿐이지, 진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가정이고 기본이 되어있는 가정이기에 서로 배움의 대상이 된다. 어디서나 그 인격의 절제와 훌륭함을 통해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
예배-회복과 축복의 기준
기본이 된 가정을 보면 마음이 좋듯이 성도의 삶에 가장 기본은 무엇인가? 예배에 성공자가 되는 것이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예배가 온전하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 가문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헌금도 다림질을 해서 정성을 다해 드렸다. 그런 미신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하는 어른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성도들에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 결코 말리지 않는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은 축복의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아이들은 새해가 되면 교회어르신들에게 단체 세배를 한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미리 어르신들에게 은행에서 빳빳한 돈을 모아서 세배 돈 봉투를 미리 만들어 드리는데, 애들이 그것을 받으면 하는 말이 있다. ‘이건 새 돈이니까 헌금하기 위해 따로 놔둬야 되겠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다음 설날에는 더 퍼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실 것 같다. 성경을 들여다보고 목양훈련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름의 원리처럼 깨닫는 것이 있다. 아무리 좋아도 예배에 실패하면 그 미래는 캄캄한 어두움뿐이지만 예배에 성공하면 가정이 살고 가문이 살고 자녀와 나라와 민족이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삶의 중심에 예배를 두고 예배를 기준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침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기준을 반복하고 훈련
기준은 어렵다. 원리는 별로 재미없어 보인다. 그러나 원리와 기준을 꾸준히 가르치다보면 어느 순간 폭발하듯 은혜가 터져 나오는 때가 있다. 반복이 꾸준한 훈련과 함께 할 때 연마된 참 실력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잘 가르치고 가르쳐서 꾸준히 반복할 때 교훈들이 아이들의 뼈속 깊이 새겨지는 것을 본다. 그래서 마침내 기준이 분명한 아이, 삶의 원칙을 분명하게 세우고 살아가는 청년, 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 지킬 것을 지키는 어르신이 된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찐 인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기준이 중요하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죄 많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과 경배하는 것, 죄 많은 인생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소원 ‘예배’에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배가 기준이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그 예배를 기준으로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좌우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편애하지 않으신다. 선택받은 자녀라 할지라도 예배가 무너지고 실패하면 그 미래는 징계와 심판의 대상이 될 따름이다.
예배를 통한 영적 강건
열왕기서의 왕들의 역사를 쭉 살펴보라. 하나님의 택한 선민 이스라엘의 왕들이니까 무조건 하나님께서 축복했는가? 선민이니까 무조건 내 새끼 내 새끼하고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랬는가? 절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 왕들이 앞장서서 밥 먹듯이 우상숭배하니까 이스라엘에 조공이나 바치던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 바벨론 제국을 만들게 하시고는 막 쳐 버리는 것을 보지 않는가?
반면에 예배가 온전하고 하나님 잘 섬기던 다윗의 시대를 보라. 그의 예배가 온전하였을 때 다윗시대에는 주변나라가 일어서질 못했다. 하나님이 눌러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예배가 시시해지고 영적으로 약해지고 하나님 섬기는 게 초라하기 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별거 아닌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가지고 막 대적을 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주변에 도둑놈 사기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왜 내 주변에 도둑놈 사기꾼들이 많을까? 자기를 잘 돌아봐야 되는 것이다. 나의 신앙 없음이, 예배의 실패가 이것을 부르고 조장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점검과 해석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 예배 잘 드리는 것이다. 예배가 축복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예배가 약해지면 영적인 힘이 약해지게 되고 마침내 삶의 조건에 일희일비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도저히 컨트롤하지 못하게 된다. 잘되면 감사하고 어려우면 기도하고 해야 하는데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정리가 안 되다보면 매사가 뒤죽박죽으로 직행한다. 잘되면 스스로 잘난 것으로 오해하면서 교만하고 안 되면 안 된다고 원망하고 살게 되니 인생 자체가 아주 혼돈스럽기가 그지없다.
이러한 연약함을 한 순간에 정리하고자 할 때 무엇을 해야 될까?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말씀 앞에 자기를 항복시키는 것이다. 순종이 안 되면 복종을 해서라도 나아와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예배가 회복될 때 교회생활이 분명해질 때 설교가 온전히 심령에 젖어들 때 영적인 힘들이 회복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영적인 힘은 삶의 고단함들과 어려움들을 제어하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가 된다. 더불어 예배가 회복된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과 가문과 자녀손들이 든든히 세워지게 될 것이다.
한결같은 예배생활
삶의 회복과 축복은 예배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삶의 회복과 축복의 정점에서 점검해야 될 필수요소가 바로 한결같은 예배생활이다. 생의 곤고한 순간들마다 이를 극복할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예배이다. 어떤 사람은 30년 40년 예수를 믿어도 은혜가 안돼서 뭘 못한다고 말한다. 은혜가 될 때만 헌신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기대하기가 어렵다. 신앙의 관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될 때만 헌신한다면 은혜 안 될 때는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신앙 성숙한 신앙이 무엇인가? 은혜가 안 된다 싶을 때에도 더 힘쓰고 더 애써 자신의 연약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는 열심을 품는 것이다.
예전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목사님이 너무 젊어서 자신을 지도하기에는 인생의 뭔가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30대중반일 때였는데 돌아보면 나 자신의 미숙함이 많이 보였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렇게 말씀하시던 분들의 신앙이란 것이 마치 길 가다가 빈 지갑을 주운 사람처럼 이리 저리 어슬렁거리며 인생의 삶을 살더라는 것이다. 그때 되물어 질문한 것이 기억난다.
‘집사님, 제가 연소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집사님처럼 환갑이 되면 그때부터는 열심히 신앙의 지도를 받으며 따르시겠습니까? 그러면 그때까지는 신앙생활 대충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결국 내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소중한 인생의 시간 열심히 일할 기회를 스스로 내어버리며 잃어버린 허송의 세월을 지나며 타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이민교회 주변에 특별히 이런 나그네 인생들이 많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은혜가 떨어질지라도 때로는 은혜가 없다 싶을지라도 한결같이 팔다리를 움직여 은혜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예배의 승리자가 되고,하나님 음성을 들으므로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만들어 끌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성도의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빼놓고 우리 인생을 복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한다. 그 예배의 자리에 삶의 기쁨과 회복, 가정과 가문의 축복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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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