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연 (남가주동신교회)
타 종교가 흉내 낼 수 없는 어느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를 통한 창조주의 사랑이다...
왜 하필 기독교인가? 이 질문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이다. 간혹 교회는 타종교의 신보다 하나님이 뛰어난 점을 가르치기도 하고 신자들의 삶이 타종교에 비해 얼마나 유순하고 이타적인지 또 얼마나 복된 것인지(그야말로 세상에서 잘 나가는 그런 복 말이다) 자랑하듯 말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들의 삶이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들보다 청렴결백할 수도 있다. 한 때 안티 크리스천이었던 나에게는 위에 열거한 주장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하는 요인이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뛰어나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고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신앙인들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들이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기반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증표도 결코 될 수 없다. 신자로서 내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유는 그가 상대적으로 더 유능한 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비신앙인보다 더 거룩하고 고결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나에게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종교가 아니라 비교 불가한 ‘옳은’ 종교, 즉 진리다.
타종교와 기독교의 유사한 점은 찾아보면 많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고대 신화에서 발췌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성경에 나오는 이적들의 표면적인 부분을 흉내 내는 수많은 이단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어느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를 통한 창조주의 사랑이다. 저자는 하나님이 그 어느 종교도 흉내 낼 수 없는 신이라는 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간다. 오직 기독교만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가신다”(p.44).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용서는 철저히 수동적이고 일방통행이다. 행위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득도나 어떤 반열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와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오직 신의 의지를 강조한다. 타락하고 부패하고 죄 짓기 좋아하는 인간의 의지를 거뜬히 이기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 말이다.
기독교는 신자들의 무능을 강조한다. 그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방법이며 비하가 아닌 호소다. 그냥 주는 은혜를 받기만 하라는 강청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삶은, 그러므로 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미 내가 발견되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저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알게 되는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자신이 깊이 깨어진 존재이며, 동시에 많은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안다”(p.120). 이는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하는 바이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인생을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명확하고 특별하게 나타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타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바로 ‘은혜’다. 저자는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은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는 우리가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함과 동시에 외부(곧 하나님)에서 아무 조건 없이 공급되어진다. 이 은혜에 대해 저자는 “받을 자격이 없으나 주어진 호의(p202)”라고 설명하며 “은혜는 주시는 분에게 달려 있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다(p.202)”고 말한다.
이 은혜 안에서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란 것은 없다. 이미 구원은 완벽히 이루어진 것이다. 타종교들은 수련과 선행을 강조한다. 자해에 가까운 훈련과 인고의 시간을 통해야만 ‘나’라는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만이 진정한 변화의 힘은 우리 내면이 아닌 바깥에서 시작되며, 구원은 우리의 성취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해 얻는다고 가르친다”(p.211). 다른 종교는 신자들의 순종을 요구하고 강요하지만 기독교만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앞세운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대로 기독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p.163)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선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종교가 아니다. 주님처럼 사는 법을 배우는 진리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행위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빠져있는 경우를 본다. 가시적인 헌신과 순종이 제공하는 일종의 안도감과 함께 마치 우리의 선행과 섬김이 구원을 보장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생활’에 더 무게가 실어진 탓이다. 생활이 있고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어야 비로소 생활이 된다. 다만 이 ‘생활’이라는 부분은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필연적인 반응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쁨으로 화답하는 것이지 나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구원론은 타종교의 구원론을 역행하는 것이다. 선행의 결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구원의 결과로서 우리는 기쁨으로 선을 행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기독교가 된다. 구원이 연약한 나에게 달려있지 않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왜 하필 기독교인가? 서론에 기재했던 이 질문에 대해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세상에는 인간을 먼저 찾아온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것, 그리스도인은 선행을 통해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 은혜로 이미 주어진 구원에 그저 기쁨으로 반응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기독교를 통해 잘되는 나를 가르치지 않는다. 혹은 성화의 과정과 자발적인 노력과 고행을 통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직 복음의 골자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선하게 사는 법, 악하게 사는 법, 복음으로 사는 법, 다른 말로 하면 율법, 방종 그리고 주님이다.(p261)”
다른 종교도 선행에 대해 강조한다. 혹은 현대의 시류를 따라 한 번 사는 인생,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만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기어코 죄를 짓고자 하는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종교적 선행에 취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병들고 연약한 자들의 눈물을 주워 담으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 ‘죽음’이라는 그 어느 인간도 피할 수 없었던 저주를 향해 알면서도 기꺼이 발걸음을 떼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 그 죽음을 이기고 이제는 부활의 생명으로 빛나는 영생을 약속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바로 기독교 신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삶인 것이다.
신앙은 성취가 아니라 도취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성취된 그 구원의 은혜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는 “자신의 메시지를 위해 남을 죽이”지만 진리는 “그 메시지를 위해 스스로 기꺼이 죽고자”(p.236) 한다. 신을 위해 죽는 종교인들은 많지만 인간을 위해 기꺼이 죽은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다. 이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신자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 책을 덮으며 다시금 느낀다. 나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행복자로다!
02.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