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예배의 축복
하나님의 교회 성전에 모든 복이 있다. 주의 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만나주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고 인생의 모든 문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회복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온전한 신앙생활은 반드시 교회생활과 예배생활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면 어디에서도 복을 받을 수 없다. 이 땅의 수많은 민족들이 잘살아 보기 위해 자신들의 신을 세우고 노력하며 빌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러시아도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던 나라였으며 다른 종교가 없었다. 그러나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으로 공산화가 되었고, 교회와 예배가 폐하여지며 하나님을 떠나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 주려 죽는 피폐한 땅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을 우상화하고 있는 북한을 보라. 하나님을 떠난 민족이 얼마나 불쌍해지는가를 똑똑히 보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없었음에도 굶주려 죽는지 모른다. 영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고 예배가 무너지자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보라. 영국에서 집회를 하고자하면 선물보따리를 풀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저들의 교회는 박물명소가 되었는데 돈을 벌기는커녕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예배하지 않음으로 돈에 굶주려가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 축복의 세팅
피조물인 인간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수립, 교제를 통하여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살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된 복은 한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고 순종함으로, 그 교제의 풍성함과 권세의 능력을 맛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의 영광을 찬송케 하는 것이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라고도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격하고 스스로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인생은 결국 하나님이 세팅해 두신 모든 복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파괴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가 무너지면 창세로부터 정하신 교제와 소통이 단절되었기에 답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삶에 복이 없다. 그러나 예배에 승리하면 모든 것을 넉넉하게 볼 수 있다.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와 능력과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 땅에서 잘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지혜도 얻게 된다. 유한한 이 땅의 생명,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땅의 시간을 아끼는 복 있는 길을 걸어가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지혜가 예배가운데 들어 있다.
예배의 실패, 모든 것의 실패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다. 구약의 수많은 왕들의 역사를 보라. 오직 한가지뿐이다. 예배에 실패하고 하나님 섬기는 대신에 우상을 섬기고 좇았을 때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가문 그가 섬기는 나라까지 망하는 것을 본다. 왜 그러한가? 예배에 실패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인가?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개치 못하는 그 마음의 완악함과 교만함이 그들을 마침내 망하는 길로 내치게 된 것이다. 예배 중에 주시는 죄 사함의 은총, 회개를 통한 회복의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사울왕이다. 사울왕은 베냐민지파 출신이다. 베냐민지파는 아주 약하기 그지없는 지파이다. 그런데 그 베냐민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한 가문 기스가문에서 왕이 됐던 것이다. 도저히 왕이 나올 수 없는 그런 가문인데 왕을 배출한 것이다.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할 때에 우리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게 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될 때에 당연하게 반응하는 것이 무엇인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하고 겸손하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세워주셨다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다고, 하나님 나를 축복해주셨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겸손하게 감사하며, 방언을 할 정도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왕 노릇을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은혜를 잃어버리면서 바라보아야 될 하나님보다 자신의 왕관의 권력에 더 눈과 마음이 가게 되었다. 그 결과 은혜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능력을 더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망할 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교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은혜를 놓치는 순간에 누구 예외 할 것 없이 찾아오는 것이 교만이다. 인생이 받은 은혜만큼 갈수록 좋아지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 은혜 안에 온전히 붙들리지 못하게 되자 결국 실패자의 인생길, 교만의 길로 달려가게 된 것이다.
그런 교만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증상을 찾는다면 무엇일까? 예배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배를 경홀히 여기게 된다. 인생교만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배의 실패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만함으로 예배가 실패하면 어떤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나느냐? 회개하는 마음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심령이 완고해져서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지를 못하게 된다.
사울의 교만이 예배를 통해 드러났다. 사울이 사무엘 오기를 기다린다. 전쟁을 시작해야 되는데, 늘 하듯이 예배를 드리고 시작해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겠다고 말했으니 기다려본다. 그런데 약속한 사무엘이 정작 제때 오지를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사울왕은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그냥 드려버렸다. 예배를 해치워버린 것이다. 교만은 예배 받으실 대상,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다. 예배도 하나의 수단처럼 도구처럼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예배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예배의 실패, 회개가 없음
사무엘이 와서 사울왕을 책망한다. 사무엘이 책망하자 그가 대답한다. ‘부득이 해서 그렇게 했노라’ 그렇게 말한다. 부득이하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억지로 해치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기 싫은데 안할 수는 없고 억지로 했다는 것이다. 예배 안 드릴 수는 없고, 예배드리고 전쟁을 치러야 되니까 형식적으로 그냥 해치웠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속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핑계와 원망만 있을 뿐 회개하는 심령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죄를 지었지만 그가 그 자리에서 사무엘에게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나를 위해 제단을 쌓아달라고, 그렇게 했더라면 그가 살아났을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어서 부득이해서 했다’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하고 싶다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셔야 가능하고,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축복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인생이 회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버림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너무 비참해지는 것을 본다.
길보아산 위에서 죽은 후 목이 잘리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나? 그 시체가 벧산 성벽에 걸렸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목이 잘린 채로 그 시체가 한참이나 떨어진 성벽까지 아마 질질 끌려서 갔을 것이다. 예배가 실패하고 회개에 인색함으로 하나님께서 한번 버리실 때 너무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버리시면 인간이 가지는 명예와 형색과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이라크의 후세인왕이 죽었을 때에 냉동창고에 집어넣고 사람들이 발로 막 차면서 사진을 찍고 놀잇감 취급을 장면이 기억난다. 사울왕이 죽었을 때도 이 분이 왕이었으니까 곱게 모시고가서 거기다 턱 걸었을까? 아닐 것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절절하게 표현을 한다.
길보아산에서 벧산 성벽을 가려면 개울도 지나가고 돌밭도 지나가야 하는데, 그곳까지 질질 끌려가서 그냥 벧산 성벽에 턱하니 걸린 게 사울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가 죽는 날 그 아들 셋도 한날 동시에 그렇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왜 일까? 예배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죄많은 인생의 회복-예배
사울의 마음속에 교만이 있었다 할지라도, 인생의 죄악 된 교만이 있다 할지라도 예배가 온전하였으면 그는 회개했을 것이고 회복이 되었을 텐데 그 죄가 예배와 관련되다보니 살길이 없어진 것이다. 예배가 무너지고 나니까 회복될 틈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가다보니까 그의 인생은 마지막이 너무나 비참한 종말로 끝나버린 것이었다. 더불어 영적가장의 믿음과 예배가 실패하니 자식들도 그 아비와 함께 철저하게 패망하고 복을 놓쳐버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울왕에 비해 다윗은 세상적으로 보기에 더 험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다. 미투같은 죄악, 살인교사, 성추행 등의 죄를 지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은 받아주시고 다윗 때문에 그 자손의 왕위를 보전한다고 약속도 했다. 사울이 애매하게 사람을 죽였는가? 성적인 죄를 지었는가? 단 한 가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예배를 실패하고 회개하는 심령이 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에 반해 다윗은 예배의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 중심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예배에 풍성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회개의 살 길을 열어놓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이 다윗을 살리는 길이 되었다. 예배에 온전함이 있을 때 죄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예배가 실패할 경우 회개의 영이 떠나가고 마침내 멸망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신앙과 목회의 최우선
마지막 종말시대를 살면서 더욱 하나님의 뜻을 잘 듣고 알기 위해 예배를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목회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소통, 교통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능력이고 권세이다. 예배가운데 모두 들어있다. 그래서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다른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에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맡기시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권세와 능력은 예배를 통해 주신다. 그래서 예배에 성공한 개인, 예배 잘 드리는 교회, 선교뿐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위해 맡기신 일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말시대를 지나가며 우리가 붙들 것이 무엇인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죽도록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이다.
davidnjeon@yahoo.com
01.2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