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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나? - 신학적(교회론적) 접근

성도들이 ‘교회’로 살아가야 할 시대

조진모 목사  (Ph.D.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현실 

 

세상이 달라졌다. 지난 2년간 지속된 팬데믹은 삶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뉴노멀(New Normal)‘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처음 수천 년에 거쳐 형성된 과거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과거 유럽과 미국에서 치명적인 팬데믹이 기승을 부렸지만 결국 사라진 것처럼 이번 코비드19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겨낼 것이라는 긍정적 목소리도 있었다. 

2021년 연말을 기점으로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되고 있다. 2차에 걸친 백신접종과 부스터샷으로도 오미크론의 전파력을 막기 힘들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전 세계는 재차 충격에 빠졌다. ‘위드 코비드(Wth Covid)’, 즉 방역체계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기에 단계적 일상회복 시행을 포기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식당사용과 여행, 그리고 스포츠모임과 같이 여럿이 모이는 장소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스스로 외출을 자제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주위에 코비드로 인해 중병을 앓거나 사망한 지인을 통해 바이러스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을 교회로 돌려보자. 앞으로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답을 얻기 위해 먼저 지난 2년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교회를 중심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나?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모이는 교회’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교회는 흩어져 살던 성도들이 주일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라는 정체성으로 이해되어왔다. 교회를 교회당 건물로 오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모일 수 없다는 것은 곧 교회가 교회되기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론적 제안이 있지만 이 역시 현실이 가로막고 있다.  

 

변화 

 

중세 이후 교회는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여왔다. 서구역사는 곧 교회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의 병원사역과 학교교육, 그리고 사회봉사 등이 조국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진보적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사회적 정의와 빈곤의 문제와 같은 사회적 주제들이었다. 그들은 전통적 속죄 교리를 포기할 정도로 이타주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현재 교회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미흡하다. 세속화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이미 17세기부터 인간중심의 사상이 사회 안에 깊숙이 자리잡아왔고, 20세기 이후에는 신학의 세속화가 급히 진행되어 초월적 하나님을 거부하는 신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에 맞서 교회는 세속화된 세상과 담을 쌓고 순수한 영적인 집단의 성격을 지녀야한다는 부담감이 발동한 듯하다. 보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더욱 앞장선 것이다. 좋은 교회란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더욱 성경적이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팬데믹이란 대단한 영향력은 교회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잘하는 것, 바른 것에 대한 정의를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거 교회는 마치 도피성과 같은 곳이었다. 심지어 민주화운동이 한창 진행될 때에도, 정부는 교회건물 안에 숨은 용의자들을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적으로 체포하지 않았다. 대학부 또는 청년부를 해체시키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지만 어떤 형태라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정부는 코비드 초기에 의도적으로 공적예배를 규제한 바 있다. 다른 모임들은 허용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예배를 ‘강행’한다며 일방적인 여론을 퍼트렸다. 교회가 코비드바이러스를 퍼트린 주범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교회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눈이 매우 날카롭다.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는 마이너스성장을 경험해왔고, 교회공동체를 거부하는 ‘가나안’ 성도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팬데믹이 덮친 것이다. 

인터넷 예배는 어떤 형태라도 수용할 수 없다며 원천적으로 거부하던 교회들이 고개를 숙였다. ‘비대면 예배’를 허용한 것이다. 언젠가 ‘위드 코비드’ 시대가 되어도 ‘대면’과 비대면’ 모두 정당한 예배로 할 수밖에 없다. ‘비대면 예배’가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이 지닌 논리적 모순 때문이다.   

‘모이는 교회’너머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강조돼야

구원과 성화의 삶은 개인적...삶으로 예배 중요성 실천 

전통 

 

교회는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를 구분하여왔다. 초대교회 교부인 어거스틴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정의했다. 나아가서 공동체로 모이는 ‘보이는 교회’ 안에는 구원을 받은 자들과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이 함께 섞여 있으나,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그 구분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좀 더 구체화 하였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의 다른 양상이란 사실을 강조하였다. 

만일 교회란 오직 성도들이 모이는 공동체라고 주장한다면 ‘보이는 교회’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을 포기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 강조점이 달랐지만 적어도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공통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고민했던 중요한 내용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확산되자 가톨릭교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 중 하나가 절대적인 국왕의 힘을 빌려 교회공동체가 예배로 모이는 것을 엄히 금하고, 반드시 구교미사에 참석하도록 강한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개혁자 칼빈이 사역하던 당시 프랑스개혁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이런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소위 ‘니고데모파’가 생겨났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할 수없이 미사에 참석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개혁주의가 가르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칼빈은 니고데모파의 행동을 지적하며 미사에 참석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하였다. 공동체로 모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개혁신앙을 지키다 순교하던지 아예 프랑스를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개혁자들의 사상이 퍼져가는 곳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핍박이 진행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성도들이 공동체로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여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선포와 성찬이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자신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 많은 성도들 무리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교회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가 변화되었다.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교회가 주도하여 새로운 상황을 헤쳐가야 할 것이다. 그 방법 중 하나로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개념정리와 실천을 적극 권장한다. 성도 자신이 특정 지역교회에 속하였지만 근원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부르심을 받은 개인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모이는 교회’를 너머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강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고 성도다운 삶과 행동을 위해 노력하였다면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성도다운 모습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신앙을 위해 근본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지금까지 공동체 예배에만 묶여 있었다면 삶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서의 예배의 중요성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성도라면 반드시 지역교회에 속해 어떤 형태라도 정기적으로 말씀을 받고 성찬에 참예하여야 한다. 동시에 팬데믹으로 인해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구원과 성화의 삶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어느 때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인다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앞으로 교회는 각 성도들이 스스로 경건생활을 영위하여 성장하는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공동체예배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는 더욱 약해질 것이다. 어려운 팬데믹을 지나면서 소그룹 지도자들을 잘 세운 교회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섭리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육현장이다. 2년간 지속되어온 이번 팬데믹을 통해 교회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보이는 교회’의 수적 성장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관심사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보다 더욱 큰 힘을 가진 교회를 요구하신 적이 없다. 도리어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진정한 성도들이 거칠고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도 영적 영향력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지난 2천년의 교회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도우셨다.    

앞으로 팬데믹이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지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팬데믹을 허락하신 그 분께서 적절한 시간에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영적인 눈을 떠서 이 상황을 바라보자. 힘들다 어렵다고 생각하여 빨리 지나갈 것을 기대하기 전에 모든 상황을 아시고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주시는 교훈을 겸손하고 심각한 자세로 받아들이자. 지금이야 말로 성도들이 ‘교회’로 살아가야 할 시대이다.

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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