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다운 교회?
“교회를 교회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있네’ 라는 제목의 복음송의 핵심 구절이다. 그렇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성도들을 통해 반드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어찌 너무도 당연한 일을 간절히 소원하며 찬양을 부르게 되었는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워야 사람이라는 옛말이 있다. 현재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싶다.
그런데 교회와 관련된 문제를 논하려면 문제 자체에 대한 지적에 앞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마음 자세가 요구된다. 자칫 논쟁거리로 전락되어 예상하지 못했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해법의 첫 걸음은 문제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일 것이다.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셨던 참 교회의 모습은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각 시대마다 교회는 현실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을 끌어안고 반응해야했다. 이로서 교회는 2천년이란 긴 세월을 걸쳐오는 동안 매우 다양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중세 유럽의 1000년 역사일 것이다. 이 시기 문화와 경제, 그리고 정치 등 사회 전반의 것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여 지침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세 유럽 이후에도 기독교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여왔다. 한 예로 미국 정부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술을 만들어 파는 행위를 금지하는 ‘금주법’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그 당시 도시중심으로 사회가 변화되면서 노동자들이 술을 가까이 하며 생활이 문란해지고 파탄에 이르는 가정이 지속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미국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던 개신교 성도들은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현재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찬반의 근거 역시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다.
무엇이 기준?
교회가 교회되어야 한다는 확신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그 기준을 분명하게 세우고 공유하는 것이다. 중세교회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지니지 못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교회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여 313년 이후 초대교회에서 사라졌던 순교의 피를 흘리는 성도들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구교 지도자들이 공유하였던 전통적 교회의 모습과 개혁자들의 주장하였던 성경이 가르치는 모습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세속의 방식과 가치관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의 생명인 복음 중심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대교회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중세처럼 사회를 향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세계적인 세속화의 강한 물결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가 휘청거리고 있다. 과거 사회에 대한 예언자 역할을 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독교는 여러 중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한 시선이 매우 차갑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비판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함께 변화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자들의 마음에 새겨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현대교회가 심히 부패하고 타락하였던 중세교회와 유사해졌다고 판단하고 전폭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자들의 목소리가 교회 안과 밖에서 커져가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교회개혁을 외치는 뉴스 웹사이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교회 내부와 목회자들의 비리와 비윤리적인 모습을 집요하게 파헤쳐 거침없이 세상에 드러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상실한 윤리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열광하는 자들과 목적은 이해가 되지만 그 방법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상반된 의견이 대두되었다. 현재 이런 종류의 뉴스에 대한 호불호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건과 사실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며 그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한 영향력을 끼치려는 의도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외치는 비판과 우려의 소리가 제법 커져가고 있다. 그들이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입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에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아예 교회는 이런 소리에 원천적으로 귀를 막은 채 우리는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서로 위로하며 지내야 할까?
성경의 역할
교회의 일은 교회 자체가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내용 중 하나이다. 교회의 개혁이란 관점에서 바라본 중세교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신학은 성경이 아닌 사변적 철학의 틀 속에 갇혀, 영혼을 살리고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하는 힘을 잃은 상태였다. 윤리적인 면에서도 인간적 탐욕의 늪에 빠져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개혁자들은 이러한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개혁자들의 배경이 다르고 강조점이 달랐지만 그들 모두가 지녔던 공통적인 의지는 성경을 교회가 교회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개혁은 바로 교회의 책임이다. 또한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종교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려는 속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시작의 중심에 서 있었던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중용을 중시하며 구교를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물까지라도 교회를 향한 비판 자체를 목적하지 않았다. 그들이 개혁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적 교회로의 회복을 염원하였기 때문이다.
지상 교회는 완벽하지 않다. 상황과 내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앞으로도 교회는 온갖 문제와 씨름하여 존속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골치로 남아있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님은 교회가 교회되는 기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엄청난 수의 성도들을 모으고 대단한 재력을 확보해도, 또한 사회를 향해 희생적으로 자선을 베풀어도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다.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감해왔다. 그리고 성경적 교회가 유일한 돌파구라는 점도 확신해왔다. 교회개혁이 언급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된 듯하다. 그럼에도 정작 교회는 더욱 개혁이 필요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대교회는 문제해결을 위한 말씀의 중요성이나 구체적인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 자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교회가 스스로 그 위치를 포기하고 있다.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세속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려한다. 특정 성경구절을 사용할 때 성경의 전체 내용 안에서 이해하기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추기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대립의 관계에 있는 상대를 무찌르는 도구로 전락될 수도 있다. 이뿐 아니다. 아예 문제해결을 위한 말씀의 역할을 무시한 채 교회가 세상법정으로 가서 영적인 문제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즐비하다. 즉 교회와 성경의 밀접한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부터 동 떨어진 모습을 추구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하나님 뜻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통로가 진정한 교회 모습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개혁의 시작은 바로 ‘나’로 시작돼
교회란..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속적인 영향과 맞서 싸워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이런 목적을 이루려면 먼저 교회는 반드시 교회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선물이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다. 지체는 머리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정상적인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사람에 의해 고안된 방법과 목적이 교회의 원래 모습과 다르다면 결코 교회를 개혁시킬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것이어도 단순히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주위에 순수한 목회자들과 성경적 교회로 잘 성장하는 교회들이 제법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순수한 십자가 복음과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을 떠나 세상의 가치를 수용하고 세속적 목적과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모습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연재된 글들 통해 시종일관하게 제안한 내용의 핵심이다.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한다며 머리를 맞대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 우매함을 중단하라.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는 신념을 앞세워 손쉽게 영적 신기루를 거머쥐려 하지 마라. 일단 겸손하게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해 상세하고 분명하게 배우는 일에 몰두하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길은 교회에 대해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하는 자세로 배운 바를 실천하라. 학연, 지연, 혈연, 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강한 응집력을 지닌 공동체 안에 안주하고 있다면 특히 이 사명에 귀를 기울여라.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우려하던 시점을 넘어 과연 얼마나 존속하느냐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아직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대형교회들이 있고 골목마다 교회들이 즐비하게 있으니 염려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큰 착각이다. 젊은이들이 줄지어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 학생이 없어 주일학교교육이 중단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그러나 2천년의 교회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매우 분명한 교훈이 있다. 모든 교회에는 생명주기가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등장한 초대교회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던 유럽의 교회들은 성도들의 관광명소로 남아있을 뿐이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이와 같지 않기를 바란다. 생명력이 넘치는 성경적 교회로 남아있기 위해 개혁적 마인드를 지니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이 모든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지상의 교회는 완벽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주님의 재림까지 교회는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에 잡힌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통로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개혁의 시작은 바로 ‘나’로 시작됨을 잊지 말자. 이 글의 독자들을 통해 교회가 강건하게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될 수 있기를 진정 원한다.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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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