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힘
“아는 것이 힘이다!” 경험을 중시하였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을 다스린다는 중세의 사상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도리어 자연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여 얻은 지식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로 과학적 지식이 인류 역사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적 사고가 중시될 구록 신학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인터넷의 등장은 지식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도서관을 찾아가 전문서적을 열람하던 시대가 사라져가고 있다. 전문가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지식을 신속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는 모든 정보가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경우가 있으며, 전달자의 지적 능력이 부족하여 오류가 전달될 수도 있다. 특히 유튜버들이 모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지식의 힘이 매우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앙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해석한 자료를 매우 쉽게 얻을 수 있다. 특정한 이슈에 대한 신학적 설명도 마찬가지다. 궁금해 하는 주제에 대한 설교도 거의 무한대로 접할 수 있다. 굳이 교회를 찾거나 목회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실정이다. 인터넷이 주는 유익이 대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식의 팽창은 신앙인들에게 치명적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아는 것 자체가 힘이 될 수 없다. 신앙은 진리를 근거하기에 사실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 요구된다.
과거에는 이단들이 교회 밖에서 활동을 하였다. 초대교회는 이단들의 공격에 맞서 성경적인 신학과 신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교회가 중심이었던 중세시대의 이단들의 활동이 크게 제한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단들이 등장하였으나 이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경계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왔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함께 성도들은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직접 접하기 시작하였다. 의도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음해하는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활동하고 있다. 이단성이 있는 지식을 전달하거나 또는 성경의 진리와 상관없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자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수록 신앙적 오류와 방종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
유럽에서 대학이 처음 생긴 것은 12세기의 일이다. 그 전까지의 교육은 교회와 수도원 부속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학교가 형성되고 정기적 수업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실력을 갖춘 교수를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모였으나 사회적 변화로 인해 시민계급이 성장하면서 교육에 대한 열의가 커져갔다. 그 결과 학위를 수여받을 수 있는 대표적 대학이 생겨났다. 1150년에 이탈리아의 볼로나대학, 1200년에 프랑스의 파리대학, 1220년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이 좋은 예가된다. 13세기 이후 많은 대학이 세워져 15세기에 들어 75개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대학의 교육은 교양과 전공으로 구분되었다. 교양은 3학(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4과(음악, 산수, 기학, 천문학)으로 구성되었다. 교양과목을 마친 자는 오직 3가지 전공 즉 신학과 법학, 그리고 의학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제 1의 학문은 역시 신학이었다.
현재 신학은 여러 학문의 일부분으로 다뤄지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 발달한 과학적 사고는 반드시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하며 증명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신학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며 그 자체로 증명이 가능하기에 어떤 과학적 사고와 비교할 때 열등한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 안타까운 것은 신학 자체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 중심을 거부한 베이컨의 혁명적 사상은 이 시대에도 주관적 판단을 절대화 하는 모습에서 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신학은 중세 사상의 바탕이었으나, 현재는 신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실정이거나, 신학적 사고를 중시하는 일부 목회자들만의 고민거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현재에도 선교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과정을 통해 신학교가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장로교의 경우 1901년에 평양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감리교는 1887년에 서울에 배재대학에 설립된 신학부를 1907년에 독립시켜 협성신학교로 개교하였다. 신학생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신학교가 있는 도시를 찾아야 했고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토록 어렵게 시작한 한국교회는 현재 많은 신학교를 통해 매년 엄청난 수의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생이 되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중단하는 헌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신학교육은 어느 때보다 수월하게 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한 것이다. 통신교육과 인터넷교육도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신학공부를 반드시 어렵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좋은 학점과 학위를 어렵게 받는 신학교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는 말도 아니다. 신학생들이 처한 환경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으며 소명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신학교육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신학교 졸업과 목회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 정도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잘못임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신학은 파편적 지식 이상이다. 신학교육의 핵심은 생각의 변화에 있다. 축적되는 신학지식은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시켜준다. 신학은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적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일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행하는 일
아는 것을 중요시할수록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그러나 교육은 지식의 전달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피교육자에게 아는 것만큼 행동의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신학교 교육은 크게 이론적인 부분과 실천적인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중심으로 전환된 생각은 반드시 행동으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신학의 부재로 인한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자유주의신학으로부터 번영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중심의 이론은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하나님중심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지식의 팽창 속에서도 진정한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현대교회는 성도들에게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제자훈련일 것이다. 어떤 자료를 사용하느냐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제자훈련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를 강조한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남들과 나누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 꾸준한 제자훈련으로 단단해진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매우 귀하다.
그러나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2년간의 제자훈련을 이수하였다고 신앙의 정점을 찍는 것은 아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열심히 외우고 깨우친 성경적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려면 반드시 자중심을 벗어나 하나님중심의 삶으로의 전환과 함께 근본적인 생각의 틀이 변화되는 놀라운 체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종교인은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근접하지만 진정한 성도는 그 진리를 분명한 것으로 믿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진리에 근거...검증되지 않은 지식 팽창은 신앙인에게 치명적
신학교육의 핵심은 생각의 변화...신학지식은 성경적 세계관 형성시켜
하나님 중심의 생각
이런 원리는 특히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은 자들을 위한 훈련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연말연시에는 새로운 직분자들에게 사역의 원리와 실제를 가르치기 위한 훈련으로 분주하다. 출석을 부를 정도로 참석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부득이 불참하게 된 경우에는 나중에라도 녹화된 강의를 반드시 듣도록 요구한다. 그렇지만 훈련에 참석하여 원리를 이해하고 실제 사역내용에 대한 설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충실한 일꾼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순종하려는 마음의 자세,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공동체가 세상 단체와 무엇이 다를까? 성격과 성향, 그리고 경험과 가치가 매우 다른 자들이 모였다는 것일 것이다. 교회가 교인을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이 교회를 선택하는 상황 속에서 매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성도들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내 방식을 고집하게 되는 경우 반드시 공동체의 조화를 깨는 일들을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강도 있는 훈련을 받는 것이 주는 유익이 있지만 모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서로의 마음에 맞추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앞세울 때 인간적 실수가 덮어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협동할 수 있는 분명한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목회자들은 물론 중직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에게 신학적 고민이 요구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건전한 신앙생활과 사역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신학적 난제는 신학자들의 몫이다. 교회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확립하고 실천할 때 인간중심의 불건전한 신앙의 모습과 인간관계로 인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방지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자는 상대를 결코 존중하지 못한다. 20세기 위대한 변증학자인 코넬리우스 밴틸 (1895-1987)은 자신의 방식대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라(Thinking God’s thoughts after Him)는 말을 남겼다. 이 시대의 교회가 귀를 기울여야 할 소중한 조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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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2021